토정 이지함, 황준량 만나러 길을 나서다

생기동의 아침이 밝았다. 싸리담장 안으로 여러 명이 모여 있다. 아침 해가 뜨기 전이라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젊은 대장 영주가 촌장을 보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촌장은 어젯밤 늦게 대강 얘기를 들은 터였다.

“누구인지 알겠느냐?”
“모릅니다. 한 놈은 정신이 있던 터라 돌담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우두머리 같은데 독기가 퍼졌는지 퉁퉁 부었습니다.”
“그냥 한군데 묻어버려.”
“네, 아버님.”

촌장은 마음은 아팠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약 그들을 살려주었다가는 십여 년 전 도락산 광덕사의 일이 되풀이 될 수도 있었다. 길 잃은 자를 애써 도와주었건만 오히려 관군을 끌고 오는 바람에 쑥대밭이 되었던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수십 명의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또한 얼마 전 살려준 자가 있어 아직도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십년 전의 악몽이  되풀이 되는 것은 아닌지…….

산중에 합세한 노루가 하도 간청하기에 보냈지만 지금도 가끔 악몽에 시달렸다. 만약 이 자들을 살려주게 된다면 차라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속이 편할 것이라는 생가마저 들었다. 지금껏 가꾸고 다져온 보금자리를 버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서느니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것이 낫다고 촌장은 모진 결정을 내렸다.
특히 생기동에 노루가 오고부터는 산중 무리는 달라졌다. 충분한 소금을 확보한  노루는 필요한 양만큼 날라서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아는 것도 많을 뿐 아니라 글과 무예까지 겸비하고 있어 산중무리에 큰 힘이  되고 있던 터였다. 어디선가 노루가 나타나 촌장에게 인사를 드렸다.
“안색이 어두운데요, 촌장님.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타인이 온 것 같다. 함정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하길래 후환을 없애기   위해 얼마 전처럼 처리하라고 일렀다. 너는 참견 말고 가만히 있어라.”
“걱정 마세요 저는 구경이나 하고 오겠습니다.”
노루는 촌장에게 인사를 하고 공터로 향했다.
생기동은 이십여 채의 토담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유일하게 촌장 댁만 싸리  울타리가 처져있고 담장에 박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촌장은 담 너머 노루를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노루는 언제 보아도 듬직했다.

노루는 날짜를 따져 보았다. 며칠 있으면 형님과 약속한 칠월 칠석이었다. 봉산   어귀에서 야밤을 틈타 처가에 안부 인사라도 전해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고 사지에 힘이 솟았다. 노루는 형님인 용두가 무사히 살아있어 만날 날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생기동의 주식량인 조 이삭이 뭉실뭉실 굵어가고 그 옆으로 옥수수가 먹음직스럽게 영글어 갔다. 노루는 허리까지 차는 콩밭을 가로질러 내려갔다.

토정은 단양 관청으로 준량을 찾아왔다가 헛걸음을 하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준량이 휴가를 얻어 관청을 비우고 없다는 것이었다. 토정은 굽실거리는 이방이  마음에 안 들었다. 벌써 수십 년 이방 자리에 있는 걸 보았지만 이방의 배만 불렀지 고을의 민(民)들은 여전히 헐벗고 못살았다. 저런 아전이 수없이 많을 거라 생각하니 입안에 쓴맛이 고였다.
글=조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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