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요즈음 감기가 정말 무섭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한 번 걸리기만 하면 일주일에서 열흘 동안은 사람을 잡아놓는 듯합니다. 저희 집은 식구 넷이 다 걸렸습니다. 처음엔 아들 녀석에게 먼저 감기가 찾아왔습니다. 하필이면 추운 날 피시방에 갔다 오더니 그날 저녁부터 바로 탈이 나더군요. 연신 기침을 해대며 오한이 찾아오는지 아랫목에 몸을 한 줌처럼 오그렸다가 금방 이불을 차내며 밤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도회지 피시방은 어쩐지 몰라도 시골은 피시방 환경이 몹시도 좋지 않습니다. 어쩌다 한 번 학생들을 찾으러 가서 보면 담배연기로 공기는 탁하기 이를 데 없고, 그 속에 누군지 분간도 되지 않은 사람들이 차원이 다른 세상처럼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습니다. 

애비의 만류를 무릅쓰고 피시방에 가더니 봐라 이 녀석아 야단도 잠깐, 좀 있으면 괜찮아지려니 하는 생각과는 달리 하루하루 늘어지는 녀석을 보며 저는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감기란 놈은 한 번 걸린 다음에는 항생제 투약 따위가 별 효과가 없는 것이라 알고 있기에 병원에 데리고 가기도 좀 그랬고요. 그렇다고 이 녀석이 제 엄마가 끓여다주는 생강이나 유자차는 입에 대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사흘째부터 이삼일간은 모든 음식이 쓰기만 하다며 한 숟갈씩 먹던 음식마저 수저를 놓아버렸습니다. 이럴 경우에 부모가 대신 앓아줄 수 있다면 세상에 어느 부모가 마다겠습니까? 그리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요. 결국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옆에 붙어 앉아 물수건을 갈아주고 숨이 고르게 잠이 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들 녀석은 엿새 만에 음식을 조금 먹고 기운이 돌아오는 듯했습니다. 온 집안이 다 환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 감기가 제 마음처럼 됐는지 이번에는 저와 딸애에게 감기가 찾아왔습니다. 딸애는 워낙 제 동생을 귀여워하는지라 그렇겠지만 저는 환자와의 접촉에서라기보다는 제 스스로 무리를 해서 감기를 불러들인 것 같습니다. 정초는 늘 그럴 줄 알지만 술이 과해지고, 따라서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됩니다. 저는 이 지역에서 굿패의 상쇠를 맡고 있는데 술 안 먹고는 굿 못 친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섣달 중순 무렵부터 정월보름까지는 술에 절어 삽니다. 특히 당산제가 몰려 있는 정월보름 무렵에는 날마다 파김치가 되지요. 하루에 몇 동네를 돌면서 굿을 쳐야 하니까요.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던가요? 원인 없는 결과 없는 것처럼 몸 관리를 이렇게 부실하게 했기 때문에 면역력이 약해졌으므로 비껴갈 수 있는 병을 불러들인 것 말입니다.

한 번 감기가 찾아온 다음에는 아무리 조심해도 소용없습니다. 물론 편히 쉬고 영양분을 고루 섭취한다면 조금 빨리 나아지겠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저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감기가 걸린 한 중간에 하필 중요한 모임이 있었고, 그 곳에서 약간 언짢은 일이 생겨서 그만 과음을 하고 말았습니다. 알다시피 감기에 술은 금물이지 않습니까, 그날 밤을 한 숨도 자지 못했는데 그 이튿날은 다시 풍어제에 굿을 쳐야 했습니다. 오후부터는 이박삼일 동안은 짚공예를 배우겠다는 손님들이 온다는 약속이 잡혀 있고요. 끝나는 날이 대보름 굿이 시작되는 정월 열사흘입니다. 눈앞이 아득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몸 상태로 일정을 소화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약국 문을 두드렸지요. 그런데 이번 감기는 약을 먹어도 증세가 나아지질 않더군요. 먹었을 때 잠깐만 몸에 열이 오르는 듯 땀이 비치다가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병원에 가서 드러누울 수도 없고 바짝 코앞에서 일정을 취소할 수도 없지요.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습니다. 방바닥에 몸을 누이면 한없이 땅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과 근육통을 견딜 수가 없어 아예 평소처럼 일을 했습니다. 장작을 패고, 이방저방 불을 때고, 손님을 맞고, 신문을 보고,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처럼 돌아다녔습니다. 그 사이 딸애도 조금 좋아진 듯하고 아들 녀석도 그만그만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최악인 상태로 송장처럼 돌아다니는 건데 식구들이야 잘 모르겠지요. 이제 마지막 한사람 남은 제 안식구가 아까부터 감기 기운이 있다고 바튼 기침을 하며 안색이 파리합니다. 이것 참 큰일입니다. 식구가 다 아파도 주부가 아프지 않으면 어찌어찌 살아날 수 있는데 살림을 사는 아내가 저러니 여간 걱정이 아닙니다. 특히 제 아내는 약을 먹지 못합니다. 당의정이나 캡슐 하나를 삼키려도 물을 몇 모금씩 들이켜야 넘어간답니다. 여차하면 이 사람은 병원에 가서 주사처방이라도 받아야 되지 싶습니다.

부지런한 분들은 벌써 양파밭 마늘밭 보리밭에 웃거름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야지요. 봄에 주는 웃거름은 일찍 줄수록 좋습니다. 거름을 뿌린 다음에 비라도 한 번 흠뻑 맞는다면 더 없이 좋겠습니다. 기침으로 잠 못 이루던 어젯밤도 마당 앞 연못에서는 개구리가 울었습니다. 수련은 벌써 뾰쪽뾰쪽 이파리를 피워 올리고 있고요. 몸이 아플수록 이런 봄의 신령에 더 마음이 다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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