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감기 앓고 난 뒤끝이 영 개운찮습니다. 예전 같으면 기껏 삼사일 견디면 물러나던 것이 열흘이 넘어가도 뚝, 하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조금만 찬바람을 맞아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코가 막히기 일쑤고 찬물에 잠깐만 손을 적셔도 몸에 오한과 근육통이 생깁니다. 나아지려니 생각하여 견뎌보는데 조금 괜찮다가도 금세 도로 그 모양새입니다. 매사에 의욕이 떨어져서 어떤 때는 아침 먹고도 자리에 누워 한나절을 뒤척이기도 합니다. 밥맛을 잃어버린 건 아주 오래 됐고요.

딱히 이것이다 하고 먹고 싶은 음식도 없을뿐더러 먹던 밥도 갑자기 목이 막힌 듯 들어가지 않아서 물 말아서 겨우 몇 숟갈 건지고 맙니다. 이러니 술 생각은 천리만리 달아났습니다. 밥이야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조금이라도 배가 고프니 먹는데 다른 음식은 몸 상태에 따라서 먹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나 봅니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갑니다만, 그러고 보면 술도 몸이 건강해야 먹고 싶은 맘이 있는 것이어서 많이 먹고 이튿날까지 부대끼던 것이 차라리 행복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될 지경입니다.

대보름 무렵에 할일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보건소에 가서 주사 맞고 약을 타왔는데 그걸 먹고 효과를 본 것 같지가 않습니다. 먹을 때만 잠시 정신이 몽롱해지고 감각이 무디어질 뿐 오히려 그 약을 해독하느라 몸이 더 고단한 것 같았습니다. 일 년이 가고 이 년이 가도 약이라고 하는 걸 입에 넣어보지 않으니 약 먹으면 쩨꺽 들음직도 하건만 마치 좋지 못한 것이 들어온 양 거부감이 생겨서 타온 약을 다 먹지도 않았습니다. 아는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저어기 먼 곳을 손가락질을 하며 보건소 보다는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뚝 떨어진다고 하며 쉰 살이 넘으면 독감예방주사는 필수인데 여태껏 그것도 몰랐냐고 나무랐습니다.

결론은 아무래도 나이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번 감기가 독하다고는 하지만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우스운 것이요, 면역력이 떨어지는 나이 든 사람에게만 만만하게 위세를 부리는 것 말이지요. 몸이 아프니 유달리 아픈 사람들의 소식이 더 자주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누가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네 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것이 또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기도 하고요. 저희 내외와 친절하게 지내는 여성 한 분이 계신데 이분이 약 두 달 전에 물혹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으셨답니다.

 악성이 아니어서 떼어내기만 하면 그전에 느끼던 여러 자각 증상들이 없어지고 정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수술을 했어도 예후가 좋지 않아서 계속 병원신세를 지던 중 청천벽력 같게도 위암 판정이 또 나와서 바로 얼마 전에 절제수술을 했다 합니다. 간간이 전화통화만 하고 문병 한번을 가지 못했는데 이런 소식이 들려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에 대면 저의 감기 정도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열흘이 지났네, 어쩠네 하는 이야기가 엄살에 지나지 않아 부끄럽기는 합니다. 하여 애써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보기도 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요즈음도 물이 쩡쩡 얼지만 우수 지난날이어서 그런지 한낮으로는 햇볕이 제법 따사롭습니다. 마루 끝에 내려앉은 햇볕은 유달리 더 아늑하고 따뜻해서 한참만 쪼이며 앉아있어도 몸에 생기가 돋는 듯합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봄바람이라기보다는 아직 겨울의 채찍 같은 것이 숨어 있는 것이어서 부르르 몸이 떨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대지의 기운을 받으며 몸을 꿈지럭거리고 싶습니다.

안식구가 일하러 나가서 없는 새에 아프다고 놀기만 하는 것에도 염치가 생겨서 화단을 정리했습니다. 지난 가을에 말끔하게 정리해 두어야 개운한 건데 꽃을 피우고 난 대궁위에 눈을 이고 서있는 모습도 괜찮게 을씨년스러운 것이어서 겨우내 그냥 놔뒀던 것입니다. 그중에 국화는 거의 겨울의 한중간까지 꽃이 괜찮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봄이 되니 검불들이 되어 어지럽습니다. 낫질하지 못하는 제 아내에게는 이걸 걷어내는 것도 일이요, 전지가위를 들고 억센 꽃 대궁이나 나무의 가지를 자르는 것도 힘에 부칠 겁니다. 화단일은 아내의 일이라고 여기며 저는 잘 손대지 않지만 이런 때나 여름풀이 무성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보태야 합니다.

모르는 사이에 봄은 화단에 가장 먼저 와있더군요. 작년가을에 묻어둔 튤립의 새순들이 땅을 밀치고 나오느라 정신이 없고, 수선화도 질세라 화단가에 줄지어서 예쁘게도 싹을 내밉니다. 목련의 줄기 끝에도, 작약의 뿌리사이에도 붉은 새눈이 올라오고 시로미는 금방이라도 꽃이 필 듯 연둣빛 눈이 커졌습니다.

 화단 곳곳에 있는 홍매는 지금이라도 잘라다 물 컵에 꽂아놓으면 삼일 안에 방안에 그 고고하고 매운 향기를 흩뿌릴 듯합니다. 쉬엄쉬엄 화단을 정리하다 보니 몸에 어연간 생기가 돋습니다. 두발을 딛고 땅을 걷는 이 행위에도 대지의 기운은 전해지나 봅니다. 연둣빛의 어린 싹에 맺힌 생명의 활기가 눈을 통해서 고스란히 제 마음에 와 닿았나 봅니다. 피는 곳을 저만 알고 있는 복수초를 찾아 나섰습니다. 양지바른 돌담 밑 가랑잎 몇 개를 들어내자 아! 거기 복수초가 수줍게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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