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에 빠진 황준량이 존귀함을 받다

“대체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거냐?”
노루와 영주 무리들 뒤쪽에서 벼락같은 노도 소리가 울려왔다. 놀라서 뒤를 보니 언제 내려 왔는지 촌장이 호통을 치며 올라오고 있었다. 모두가 멈칫거리며 무기를 내려놓았다. 주춤거리면서 노루가 촌장 앞으로 가자 촌장의 손이 노루의 뺨을 후려쳤다. 노루가 풀썩 주저앉자 촌장이 영주를 부른다. 영주가 무릎을 꿇고는 고개 숙인 채 읍조렸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노루가 함정에 있는 분은 군수 영감이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군수 영감이라고? 일은 이미 시작됐다. 더 이상 나서지마. 그리고 저긴 왜 활을 겨누고 그래?”
“저 아래 또 한 무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무리인가 봅니다.” 촌장이 다가가 아래를 내려 보자 토정이 소리쳤다.  “만약 군수를 죽인다면 평생 후회하며 살 것이오.” “네 놈은 누구인데 그런 말을 하는가?” “나는 토정이라 하오.” “토정? 청풍 군수를 지낸 이지번의 동생이요?” “그렇소. 거기 있는 군수가 내 친구요. 그 자는 당신들을 위해 일할 사람이니 제발 해치지 마시오. 내가 보증하리다.” “이공이 보장한단 말이요?”

“이공 소리하는걸 보니 글깨나 깨우친 것 같구료. 그러니 내 말을 먼저 들어보시오. 저 사람은 틀림없는 선비요. 진실한 목민관(牧民官)이란 말이요.”
“그렇다면 이공이 이 언덕으로 올라올 수 있겠소? 죽을 수도 있는데?” “상관없소.” “좋소, 올라오시오.”

“아버님 아니됩니다. 죽여야 합니다. 십년 전 일을 잊으셨습니까?” 영주가 죽여야 한다고 하자 노루가 촌장을 보며 외쳤다. “아닙니다. 작은 아버님 살려야 합니다. 저분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허허, 이놈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노루, 너는 저리가 있어 너는 단단히 혼나야 돼.” “그리고 영주 너는 저자가 서툰 짓을 할라치면 바로 목을 쳐라.”“작은 아버님, 군수님은 좋은 분입니다. 제가 미처 말씀 못 드린 것이 있습니다.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안 되겠다. 이놈 저 멀리 끌고 가. 너희들은 여차하면 저놈들의 구덩이를 묻어 버리고 알겠냐?”

토정이 언덕에 오르자 영주는 긴 칼을 빼어 가슴 근처에 댄다. 토정이 촌장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보아하니 이곳의 두목 같은데 저 속의 군수를 살려주시오. 이곳을 염탐하거나   해칠 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하오.”

“내 일찍이 토정 선생의 명성을 들은 바 있지만 그대가 토정인지 확신할 순 없지 않소? 내 토정을 본적이 없으니. 영주야! 일단 저자들을 꺼내 보거라. 그러다 잘못되면 이자까지 다 묻어버리면 되는 것이고.”

촌장의 명령에 몇 명이 갈고리를 내려 보내 걸리는 대로 끌어 올렸다. 장사가 먼저 끌려 올라왔다.
“노루, 이 자를 아느냐?” “네. 장사라고 저잣거리 사람인데 아전입니다.” 그는 다리를 다쳤는지 다리가 심하게 부어 올라있었다. 다시 한 명이 갈고리에   꺼내 올려졌다. 무관이었다. “이 자도 아느냐?” “네. 무관입니다.”

마지막으로 준량이 끌어 올라왔지만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얼굴 전체가 심하게 퉁퉁 부어 있어 눈은 감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독기 때문인지 목이 부어 말을 잇지 못했다. 가늘게 뜨인 눈에 노루가 뜨이자 준량이 노루를 향해 손짓을 하였다. 노루가 조심조심 다가가서 보니 틀림없는 준량이었다. 노루는 준량의 몸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촌장의 마음은 심란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치료도 해주고 돌려 보내주고 싶지만 십년 전의 일만 떠올리면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도락사건 이후 이곳으로 이주해 와 혹독한 고생을 해서 이제 겨우 터전을 잡았는데 이자들에 의해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더한 경우엔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후한을 없애기 위해서 모조리 죽이는 것이 나았다. 영주의 말대로 하는 것이 순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영주야, 나 좀 보자.” 촌장은 영주를 부르며 흉물스럽게 부어오른 준량을 힐끔 쳐다보았다. 토정이 말했다. “이보시오 촌장, 저 아래 젊은이도 살려주시오. 이름이 남생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던진 돌에 맞아 상처를 입었소.” 영주와 촌장의 눈이 마주쳤다. “남생이라고 했소, 지금? 남생이란 이름이 확실하오?”
촌장이 토정에게 확인하는 동안 영주는 한 걸음에 벼랑 밑으로 뛰어갔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