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작년 늦가을에 따 둔 늙은 호박이 서른 덩이나 되었습니다. 묵은 밭이 하나 있는데 몇 년째 그냥 두고 보기 싫어서 풀과 칡넝쿨을 베어버리고 호박을 심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름이 되자 풀이 다시 우거지기 시작해서 호박넝쿨은 보이지도 않게 되더군요. 호박은 풀 속에 들면 열매를 잘 맺지 못하는 것이라 몇 차례에 걸쳐 풀을 베어주느라 땀깨나 흘렸습니다. 구덩이 파고 거기에 거름 넣고 했던 공력이 아깝기도 하려니와 그냥 놔둬버리면 다시 묵은 밭이 될 것 같아서요. 덕분에 줄곧 풋호박을 많이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가을엔 새파란 풋호박을 여러 덩이 썰어 말려놓기도 했습니다. 서리가 올 무렵의 그것은 유난히 더 달고 맛있어서 말려놓으면 겨우내 맛있는 즙나물을 해먹을 수 있으니까요. 늙은 호박은 몇 덩이밖에 없으려니 생각했는데 풀이 마르고 나니 여기저기 숨어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서 속으로 호박농사 한 번 잘 지었구나, 하고 옹골져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저걸 다 어떻게 하누? 하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호박은 얼면 썩어버리기 때문에 안에 들여놓을 곳도 마땅찮고, 흔하디흔한 것을 누구에게 주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도 일단 다 따다가 아래채 거실에 쟁여두었습니다만 짐작했던 대로 불을 넣지 않는 곳이라 겨울의 한 중간부터 얼어서 썩고 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그 당시 소 키우는 사람에게라도 실어다 줄 걸 하는 후회가 생겼습니다. 가뜩이나 소 값이 싼데 사료 값은 비싸기 짝이 없어서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요.

그러던 중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호박엿 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순간, 저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호박엿을 한번 해보기로요. 그러려면 커다란 솥이 하나 있어야 할 것 같고 허드렛나무나마 몇 짐 있어야겠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설도 앞에 둔 때라 집안에 엿 고는 단내와 김이 펄펄 나는 것도 꽤 정겹고 훈훈할 것 같았지요. 딸애가 또 설 쇤다고 미리 내려와 있어서 도움을 받고, 겸해서 엿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좋다 생각했습니다.

늘 그렇지만 마음먹은 일, 생각대로 되어주지 않습니다. 그것도 계획이 지나치게 치밀하거나 기대가 부풀면 더욱 그러합니다. 설 전에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지 사흘 전까지 시작을 못했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설 쇠고 하기로 미뤘고요, 설을 쇠자마자 이제는 장을 담그는 일이 더 급해서 그걸 하느라 또 며칠을 미뤘습니다. 엿을 하려면 밖에다 솥을 걸어야 하는데 설 쇠고 몰아닥친 입춘추위도 그것을 방해했습니다. 그 사이 딸은 하루하루 조르고 다그치며 아비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올라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고 정월이 다 가서야 이제껏 썩지 않고 남은 호박 서너 덩이마저 버리게 되는 게 아까워서 엿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날이 조금 더 풀어지면 고추장을 담그겠다는 아내도 물엿 대신 조청을 써야 한다며 저를 닦달하고요. 마침 딸이 다시 내려와 엿 하는 것을 배우고 싶다 하고요.

해서 저는 늦었지만 저질러 버릴 요량으로 읍으로 솥 사러 간다고 나서면서 아내더러는 호박을 가져다 갈라서 속 긁어내고 껍질 깎아 놓으라고 시켰습니다. 딸 얼굴 가까이서 보며 살림살이 가르치는 것, 어헤라 댕헤야! 참 좋은 일이어서 다른 이유는 다 시답잖기도 하지만 솥을 사러 읍에 나가면서 가만히 가는 날짜를 꼽아보니 아 글쎄 지금은 또 감자를 땅에 묻어야 하는 때이고 지난번 마늘밭 웃거름 하면서 눈에 밟혔던 그놈의 뒤엉클어진 풀을 지금 꼭 매주어야 하는 때이군요. 별 볼일 없는 살림살이도 이렇게 바쁜 게 좋은 것인가요? 아무 먹잘 것 없이, 남 알아주지도 않는 일로 천금 같은 시간을, 그래도 저녁때면 어디서 먹었는지도 모르게 술은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들어오는 이런 것도 괜찮은 것인가요? 바쁜 시간 내서 그래도 아비에게 무엇인가를 배우겠다고 내려오는 딸애의 반가울 얼굴이 이내 미안한 것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아내가 어제 깎아 놓은 호박을 삶고 씨감자를 가릅니다. 새로 산 새하얀 양은솥을 바깥마당의 화단 옆에 걸고 호박과 적당량의 물을 부어 불을 매주고 딸애에게 때라고 이르며 저는 멀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봅니다. 새삼스레 새하얀 저 양은솥에 마음이 갑니다. 저렇게 큰 것을 장만한 것은 가을에 메주콩을 삶을 때마다 남에게 솥을 빌리지 않기 위해서인데 메주보다도 엿을 먼저 하게 되는군요.

저는 아버지어머니의 살림살이를 물려받아서 여태껏 별 어려움 없이 살았는데 어머닛적 냄새가 풍길 수밖에 없는 저런 살림살이를 제가 직접 사서 집에 두며 쓰게 되니 기분이 좋습니다. 저 호박이 완전히 무르게 삶아지면 망사 보자기에 짜서 건더기는 버리고 그 물로는 흰 쌀밥을 해야 됩니다. 그 밥에 나머지 물과 엿기름물을 넣고 식혜처럼 삭힌 다음 다시 짜서 거기서 얻어지는 물을 다리면 엿이 되는 것입니다. 다리기 시작하여 아마 하루나 하루 한나절이면 끝이 날 것입니다.
저는 짬짬이 밭에 거름을 뿌리고 갈아엎어서 씨감자를 묻으렵니다. 그러고 나서 비가 적당히 내려준다면 스무날이나 한 달쯤 후에 감자 싹을 볼 수 있겠지요.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