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생사고락을 함께한 ‘남생’과의 운명적 만남

“남생아, 남생아.”
바위 밑에 웅크리고 있던 남생이는 헛소리를 들었는가 싶었다. 꿈에서나 들었던 부모님 목소리, 형님의 목소리였다. 바위 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남생이의 눈이 커졌다. 꿈이 아니었다. 저 멀리 뛰어오는 사람은 꿈에나 그리던 형이었다. 형이 자신을 부른다. 동생이라고 울부짖으며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남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형님이 맞는지 물었다.

“그래 자식아, 형이야.”
남생이는 아픔도 잊고 겨우 몸을 돌려 바위틈에서 기어 나왔다. 다리를 질질 끌며 나오는 남생이의 몸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 걸음에 달려오던 영주가 남생을 끌어안자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구한 운명의 만남이었다.

십여 년 전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을 도와 도락산 아래로 내려가게 했더니 곧바로 그들의 연락을 받은 관군이 도락산으로 들이닥쳤다. 관군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고 불태웠다. 칼을 피한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미처 피하지 못한 무리들은 그저 벌벌 떨고 있었다.

남생의 부모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움막으로 몸을 숨겼지만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관병에게 발각되었다. 관병이 휘두르는 칼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속수무책 쓰러졌고 남생과 누이는 관병에게 끌려갔다. 남생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영주 자신과 아버님만 겨우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생기동에서 터를 잡은 지 십년째였다.

남생과 누이는 관병의 손에 이끌려 제각기 헤어졌다. 남생이가 힘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남생은 노예로 팔려 토정의 노비로 들어왔다. 어리지만 열심히 하는 남생이 마음에 들어 토정은 가끔 길동무를 삼곤 하였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남생의 과거를 들은 토정은 한양 마포 나루에 토방을 짓고는 잡학을 공부하면서 가끔씩 남생이를 가르치곤 했다.

토정은 단양 땅을 좋아했다. 자신의 선조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단양에만 오면 기분이 좋아지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토정 곁에서 남생은 열심히 배운 탓에 토정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고 토정도 그런 남생을 지난 해 노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토정이 단양 땅에 머물 때면 남생이는 토정의 수발을 들었다. 이따금씩 토정이 ‘여기가 네 고향이다’하고 말해주었지만 어렸을 적 떠나온 곳이라 고향이란 말이 낯설게만 느껴지곤 하였다. 남생이 기억하는 거라곤 단지 상인에게 끌려가 배를 타고 이곳을 스친 어슴푸레한 기억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피붙이 형을 만난 것이다. 늘 고아라 생각했었는데 가족은 꿈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실제로 본 형의 얼굴은 꿈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남생이는 연실 눈물을 닦아 내렸다.

“형님, 토정 선생님은요? 제가 모시고 있는 분인데…….”
영주는 남생을 데리고 생기동으로 올라갔다. 생기동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낯선 사람 여러 명이 마을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십여 명의 무리는 불안과 초조한 눈길로 한 토담집을 응시하곤 하였다. 영주는 동생을 찾자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마치 나들이 가는 어린아이 마냥 들뜬 얼굴이었다. 남생의 부서진 다리에 남생의 아버지인 촌장이 정성껏 침을 놓아주었다. 찌는 열기와 한약 냄새가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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