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날 가무는 것만 핑계대고 일을 조금씩 늦춰왔는데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자연의 시간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어서 어느새 꽃피울 건 꽃피우고 잎 돋울 건 잎이 돋습니다. 그것이 단지 가문 날의 먼지 탓에 화사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땅속에 들어있는 것들도 고개 내밀기를 주춤할 뿐이지 인간처럼 준비 없이 손넘기지 않습니다. 믿지 못할 비 소식이 사람을 놀리듯 또 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어야 할 듯싶어서 한나절은 나무를 심었습니다. 엄나무입니다. 음나무라고도 하지만 그 가시가 너무도 엄엄한 탓에 엄나무라는 표현이 맘에 듭니다. 엄나무는 신경통 관절염에 대한 뛰어난 약성을 가진 나무입니다. 민가의 문설주위엔 잡귀잡신을 막기 위해서 성성한 가지를 잘라서 걸어놓기도 하지요. 제 집엔 그것을 걸어놓지는 않았지만 제가 무릎관절이 좋지 않은 탓에 봄에 돋는 새순을 따서 먹기 위해 몇 년 전부터 계속 심어왔던 나무입니다. 봄에 돋는 새순을 두릅보다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 줄기는 물을 달여서 술이나 식혜를 해서 먹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닭백숙을 할 때 넣으면 더없이 좋은 맛을 내는 약재라고 알려져서 많이 찾는 것 같습니다.

어디 심을 곳이 마땅찮아서 이번에는 사람 많이 지나다니는 길옆에 심었습니다. 산에 있는 큰 나무 밑에 자라는 어린나무를 눈여겨 봐놨다가 캐오기도 했고, 작년의 그것을 일 년간 뒤란에 심어서 잔뿌리가 더 많이 내리게 한 것을 파 옮기기도 했습니다. 모두 열 그루입니다. 심으면서 걱정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길옆이라 탐스러운 새순이 피면 손을 타기도 할 테니까요. 제 사는 집이 산 밑에 외따로 있어서 그런지 어쩌다 집에 사람이 없는 화사한 봄이면 화단의 튤립 따위가 몇 뿌리씩 주소를 옮기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햇빛 좋은 마루에 앉아서 잘 쉬었다 가노라고 메모를 남기기도 합니다. 앞엣것은 더없이 화가 나고 나중 분에게는 비록 낯모르지만 참 좋은 마음이 생깁니다. 만일 엄나무도 그런다면? 그러나 아무래도 제몫이 더 많지 않겠습니까? 저 또한 누구의 허락도 없이 산에서 옮겨온 나무들이니 그다지 걱정하지 않기로 합니다. 프랑스의 작가 장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책을 세 번 읽었습니다. 어릴 때는 그냥 읽었고, 커서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며 읽었고, 중년에는 고서가 다돼버린 것을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찾아내 한자 한자 마음에 담아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나무를 좋아하고 그것에서 인생의 어떤 가르침을 얻으려 했던 것 말입니다. 나무에 관련된 책도 그래서 봐 왔는데 우리나라의 것은 임학자 임경빈 선생이 쓴 <나무 백과>가 가장 좋아서 그것도 세 번을 읽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제가 시방 농사짓고 있는 집 앞의 밭을 다 팔아서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졌거나 흙살 좋은 남향의 산 하나를 사서 평생 나무를 심어 가꾸는 꿈 말이지요. 그러나 꿈은 꿈이었을 뿐 우리나라는 ‘나무를 심은 사람’의 프로방스지방과 같은 구릉이 있는 것도 아니요, 누구처럼 수목원을 만들 수 있는 흙살 좋은 땅이 있어 저에게까지 차지가 올 리 만무하지요. 제 땅은 또 제가 일궈낸 땅이 아니고 제 할아버지, 아버지가 ‘손톱 발톱 잦아지게’ 일군 것을 제가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동의해준 형제들이 우애 있게 한동네에 계시는데 제 꿈이 좋은들 그것을 팔 수 없는 것입니다. 해마다 나무를 심는 것은 그 꿈의 변형일까요? 나무를 심는 그 행위에 무슨 변형이랄 게 있겠습니까? 한그루라도 때 맞춰 심지 않으면 왠지 마음이 허전하고, 봄을 맞이할 자세가 아닌 것 같고, 백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듯하고, 나무에서 배우기를 포기하는 것 같아서 그 모든 것들에 다짐을 두기 위함입니다. 심어 놓으면 나무처럼 잘 자라는 것도 없습니다. 유기농 농사를 짓는답시고 거름 한줌 쓸 때마다 늘 벌벌 떨면서 아끼는 사람이라 나무에게까지 거름을 많이 넣지 못하지만 흙살 좋은 곳에는 거름이 없어도 한 해 한 해 눈부시게 자랍니다. 개중에는 심어놓고 돌보지 못해서 죽는 것도 여러 그루고, 처음부터 자리를 잘못 잡은 듯해서 이리저리 파 옮기기도 하고, 어떤 것은 베어버리기도 합니다.

엄나무를 심고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비가 온다는 예보에 한 가닥 희망을 가지기도 해서지만 물을 부어주면 어떤 땅은 더 굳어져 버리기도 하지요. 뿌리 상하지 않게 하고, 욕심내지 않고 우듬지 적당히 잘라주고, 마르지 않게 두툼하게 낙엽 덮어주고, 때늦지 않게 심으면 그게 좋습니다. 그 위에 조금이라도 비가 내려서 땅 전체가 습기가 있으면 더 좋지요. 엄나무를 심고 나서 울안에 있는 때죽나무 밑을 살펴봅니다. 산 작약을 몇 뿌리 심어두었는데 나무뿌리 근처에 온갖 거름 됨직한 것들을 버려둔지라 그것 때문에 혹시 새순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돼서입니다. 이내 어렵지 않게 작약의 붉은 새순을 찾아내고, 놀랍게도 아기 새끼손가락만한 호랑가시 어린 묘목 두 개를 발견했습니다. 이곳이 호랑가시의 북방 한계선이어서 자생지 한 곳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는데 그 붉은 종자에서 싹튼 어린새싹을 보기는 처음입니다. 아내를 불러서도 보게 하고 저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불같이 노력하진 않았지만 이것처럼 어리고 순하게 살수야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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