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기다리던 비가 아주 잘 오신 다음의 맑게 갠 날이 참 포근하기도 해서 모처럼 산엘 갔습니다. 수돗가 옆에 놓인 절구통에 고인 물로 볼 때, 아니 집 옆 개울물 흐르는 걸로 짐작해 볼 때 겨우내 중국발 미세 먼지와 황사에 찌든 산의 나무들과 꽃들이 비에 씻겨 깨끗해졌을 것이기에, 그리고 지금쯤 저만 아는 곳에 피어있을 복수초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해서요. 아주 이른 봄 눈 속에서 피는 게 복수초지만 그곳은 계곡 깊은 곳이어서 양지바른 곳의 바람꽃이나 노루귀 따위가 거의 다 지는듯해야 핍니다. 그래서 이참에 꽃을 좋아하는 몇 분들 오시라고 해서 함께 갔습니다.

집에서 오전 열 시쯤 출발했는데 할일이 없는 비온 뒤끝이라 걸음이 느려질 대로 느려졌습니다. 길옆에 새로 돋는 새파란 새싹들에게도 인사를 건네듯 한동안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고 그것들의 이름을 말해주느라 뒤에 오는 사람을 언제까지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길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넓고 좋은 너럭바위를 만나면 일부러 가서 앉아보기도 하고 자그마한 폭포에선 오랫동안 둘러서서 마치 선계의 그것을 보는 듯 바라보았습니다.

산의 능선을 타는 것도 아니고 해찰은 할 만큼 하는 산행인 탓에 숨 가쁘지 않고 한 시간 반쯤 후엔 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짐작대로 복수초는 그 샛노란 꽃이 이제 마악 절정이어서 계곡 한편이 온통 샛노란 이불을 펼친 듯 화사했습니다. 모두 탄성을 내지르며 새로 나오는 어린 싹과 꽃 대궁을 밟을 새라 흙 땅을 놔두고는 돌멩이를 디디다가 몸을 기우뚱거리는 모습들이, 이 세상을 다 담는 듯 꽃 한 송이를 오랫동안 카메라에 담는 모습들이 참 아름답다 생각했습니다. 사람도 저처럼 자연과 한 몸이 될 때 더 아름답구나 생각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저 꽃들과 꿋꿋이 자란 나무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도 안타가운 일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극히 몇몇 사람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곳도 사람의 발자국들로 길이 넓어졌고 군데군데 수없이 파헤쳐져 생채기가 날만큼 나있었습니다. 해마다 이른 봄부터 이 무렵까지는 야생화를 찍으러 산엘 들어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주말과 일요일이면 더 많이 오는데 그 복수초 군락 지는 저희 집 뒤로 난 오솔길을 통하지 않고는 가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그중의 대부분이 해마다 늘 오다시피 해서 얼굴이 익은 탓에 가벼운 인사는 물론 서로 꽃 소식을 묻곤 했지만 설마 이랬을 줄이야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한두 명, 혹은 두세 명이었겠지요. 하지만 여러 사람을 안타깝게 하는 것도 그들이요, 모든 사람에게 혐의를 씌우는 것도 그들임을 생각할 때 산에 온 나는 어찌해야 하는지 생가하기도 합니다. 꽃만 보고 되돌아오기가 조금은 아쉬워서 땀도 좀 낼 겸 능선에 올라서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에 다시 한참을 앉았다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 시간이 약 세 시간, 뒤란 잔디밭에 멍석을 펴고 둘러앉아 집에 두고 간 배낭속의 도시락을 꺼내 점심을 먹었습니다. 어른들만의 도시락이어선지 누구하나 김밥 싸온 이도 없이 모두 밥에 한두 가지 반찬으로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 흥이 참 담백하기도 해서 저는 담가놓은 막걸리 한 병을 내 놓았습니다. 진달래 개나리 그리고 벚꽃 어우러지는 날의 화전 아닌 바에야 한 병의 술로도 아쉬움을 달래기는 충분하다 생각했습니다.

그 이튿날도 날이 더 없이 온화했습니다. 전날은 간간이 찬바람이 불기도 했는데 바람 한 점 없이 햇빛이 맑았습니다. 밭일을 하기는 땅이 좀 질기도 할 듯했으나 어쩐지 토방마루 가득한 그 봄기운에 마냥 몸을 맡기고 싶어서 저는 마루에 앉아서 밀린 신문을 읽는 중이었습니다. 이곳은 시골이어서 토요일은 배달이 되지 않는 까닭에 월요일에 한꺼번에 신문이 오고, 그 토요일 월요일 신문은 술 먹느라 바쁘면(!) 밀려 놓을지언정 빠트리지 않고 읽습니다.

그렇게 한참 햇볕과 신문을 즐기고 있는데 누가 갑자기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크! 예고 없이 오는 손님 반가울리 없어서 아마 제 얼굴에 잠깐 주름이 갔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오래가고 말았습니다. 그이는 이곳에서 저와 함께 초등학교를 다닌 후배로서 오래전에 집을 떠나 어느 도시에 사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여기저기 아는 사람은 이루 셀 수 없고 입에 올리는 그 유명한 분들과는 하나같이 친한 듯 말을 해서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가만 듣기만 했습니다. 말할 때마다 어깨를 겯는다든지 무릎에 손을 대는 버릇도 언짢아서 좀 떨어져 않을 요량으로 저는 마루 밑 토방에 쪼그리고 내려앉았습니다.

그래도 또 옆에 와 앉으며 그칠 줄을 모르니 제 얼굴이 펼 리가 없었겠지요. 어제의 꽃 느낌과 함께했던 그 사람들, 그리고 오늘 이 토방 마루의 봄 햇살이 자꾸만 흐려져서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그 사람은 왜 눈치도 없는지 모르겠더군요. 말 섞으면 길어질 것 같아서 겨우 흥흥 코대답뿐인데도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저라고 하니 난감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대함의 좋고 나쁨이 저같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사람도 또 있을까요? 그에게 제가 됨됨이의 시험을 받는 것 같아서 스스로도 몹시 언짢은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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