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서너 번에 봄이 절정입니다. 아니 봄이 벌써 다 가버린 듯 초여름의 날씨군요. 밭둑의 풀이 벌써 예초기를 들이대야 할 정도로 자랐고, 지난겨울에 갈아놓은 밭에도 풀이 무성해져서 지금 당장 다시 갈지 않으면 뿌리가 다 엉켜서 힘이 들것 같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다가 이리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나다니면서 눈에 얼른 보이는 풀만 걱정을 하였지 마늘 밭에선 고자리들의 잔치가 벌어진 줄을 까맣게 몰랐으니까요. 왜 모르기야 했겠습니까, 얼마 전에 마늘밭 웃거름을 하고 풀을 매주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고자리들을 몇 개 발견이야 했지요.

그러나 그것이 워낙 작고, 몇 군데서 밖엔 눈에 띄지 않고, 서리가 오고 얼음이 얼도록 날이 추워, 지 까짓 게 얼마나 뜯으랴 하고 무탈하게 여겼을 뿐입니다. 그러는 사이 한 일주일 간격쯤으로 비가 몇 번 오면서 땅 질다는 핑계로 마늘밭 근처에 가질 않았는데 그 사이 마늘밭 전체가 온통 까만색고자리들로 뒤덮여버렸습니다.

이렇게 순식간일 줄은 몰랐습니다. 약을 뿌리려고 해도 고자리가 어느 정도 눈에 보여야 뿌리지 그 넓은 바탕에 몇 군데 생겼다고 뿌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 같은 유기농은 약이 고자리를 직접 죽이는 게 아닌 미생물을 이용한 것이라 예방차원의 방제를 하기가 썩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 안일한 방심이 결국 이 모양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고자리도 어릴 때 약을 뿌려야 사라지지 조금만 커도 미생물농약은 별효과가 없는데, 개체수가 늘어나길 기다렸으니 갑자기 더워진 날씨 탓을 한들 저의 게으른 것이 가려질리 없겠지요.

어린 풋마늘이나 뽑아서 마늘 나물을 하려고 밭엘 갔는데 한쪽에서부터 차근차근 낫으로 벤 듯이 마늘을 갉아 먹어치우며 땅바닥에 새까맣게 기어다니는 고자리들을 보니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예년과는 달리 갑자기 폭발적으로 땅에서 솟아나온 듯한 이것들은 벌써 4년째 저를 괴롭힙니다. 지난겨울 이렇다 할 눈이나 추위 없이 지나간 게, 그리고 갑자기 날씨가 더워진 게 아무래도 조금은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만 그나저나 저것들을 이제 어떻게 해야 된답니까?

이럴 때 정말 고민이 됩니다. 심고 풀매고 거름해서 가꾼 것들이 이유가 어쨌건 저 지경이 되면 화나기보다는 힘이 빠지고 포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고자리 미운 것이야 관행농약 한 방이면 전멸일 테지만 30년 가까이 지켜온 약속을 한방에 날릴 수야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그 대책 없음에 더 힘이 빠지고 무기력해집니다. 박문기라는 농사꾼이 있는데 그이는 논밭에서 풍물 굿을 친다더군요. 그러면 고자리와 병해가 없어지고 곡식들이 튼튼하게 자란다나요? 그 말을 들을 땐 참 뭐 이런 게 있을까 싶어 웃음이 나왔는데 이제 그게 예사로 들리지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은 생각과 남모르는 어떤 원리를 깨달았겠거니 하는 수긍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그러한다면 아마도 많은 분들이 옛날의 저처럼 웃으시겠지만 이 고자리들 앞에 저는 그만 무릎이라도 꿇고 싶습니다.

소반에 물 한 그릇, 음식 한 접시라도 올려서 갖다 바치며 제발 이제 제 밭에서 나가주실 수 없냐고, 몇 년 후에 다시 오더라도 이제는 좀 나가주실 수 없냐고 사정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없어지기만 한다면 누구든 열 번 스무 번이라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이성이라고 하는 합리주의는 그것을 믿지 않기에 거부합니다. 믿지 않는 것을 홀로 믿는 마음, 그것이 이 세상을 바뀌게 하는 것은 아닐까 곰곰 생각합니다.

날이 따뜻해져버리니 천지사방이 온통 꽃이어서 좋긴 합니다. 매화도 채 지지 않았는데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살구꽃 앵두꽃 자두 복숭아꽃이 앞 다퉈 피어납니다. 이 꽃들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피는 것인데 올봄은 그런 순서도 없어진 듯합니다. 사월도 중순이 넘어야 피는 벚꽃이 이것들과 같이 피어났으니까요. 또 이것들보다 일찍 피어나는 장다리꽃 같은 것은 이제야 꽃망울이 달리고 있습니다. 배추 장다리꽃이야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없어졌으니 갓 장다리입니다. 옛날에는 꽃도 귀해서 봄에는 겨우 산의 진달래와 텃밭의 장다리뿐이었습니다. 어쩌다 살구 자두나무 꽃이 동네에 한두 집 피었고요. 먹고살기 나아지니 꽃과 나무들을 많이 가꾸어서 눈이 좋습니다만 덕분에 제 꽃가루 알레르기비염도 발동이 걸려서 에취! 에취! 쉼 없이 재채기 질입니다.

이렇듯 사월은 저에게는 희비가 엇갈리는 달입니다. 아니, 늘 견디기 어려운 달입니다. 그것이 올해는 스무날정도 당겨진 듯합니다. 당겨진 만큼 빨리 끝나면 좋을 텐데 그게 단지 저의 희망사항일 뿐이겠지요. 견디기 어려운 일은 견디기 어려운 대로 그냥 무연하게 참으며 갈 수밖에 없는 것이긴 한데, 요즈음 뉴스를 보면 바깥세상의 일은 정말 장난이 아니게 돌아가더군요. 생활비가 없어서 세 모녀가 자살하는데 대기업 임원은 천문학적 연봉을 받는 것과 기초공천을 둘러싼 여야의 대립이 그렇고 군사훈련으로 일촉즉발의 긴장을 더해가는 남과 북의 거침없는 군사훈련이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게 전쟁인데, 전쟁에 대해서 우린 시방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그것이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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