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인가, 추문인가…영국 왕좌 포기케 한 유부녀

  
 
  
 
신문, 방송, 영화를 비롯한 각종 정보매체를 일컫는 미디어(Media)의 활성화는 유럽 왕실의 귀부인들이나 현대 국가의 퍼스트레이디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녀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조명하는 미디어의 집요함에 노출돼 사생활을 잃어갔다.

그러나 전직 영화배우였던 그레이스 켈리나 에바 페론처럼 미디어에 노출됨으로써 로열패밀리에 입성하거나 영부인이 되는 기회를 잡은 이도 있었다.

무수한 매체 속의 그녀들의 이야기는 순결한 사랑이 되기도 하고 또는 추잡한 스캔들이 되기도 한다. 이번 시리즈는 미디어를 통해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는 현대판 신데렐라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들의 삶이 모두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행복하지는 않았다.


왕의 퇴임사

“내가 왕위를 버리는 이유에 대해 국민들은 다 알고 계시고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중략)… 사랑하는 우리나라 대영제국을 결코 잊지는 않을 것입니다…(중략)… 내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은 나는 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할 수 없다면 나는 왕으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36년 12월 11일, 라디오를 통해 영국 전역에 방송되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의 음성은 국민들을 경악시켰다.

“정말 폐하께서 미치지 않고서야….” “악마의 농간이 틀림없어.” “그 빌어먹을 미국 년이 도대체 우리 폐하를 어떻게 한 거야?”

별별 흉흉한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영국 뿐 아니라 전 유럽이 발칵 뒤집혔다. 영국의 국왕이 이혼녀와 결혼하기 위해 왕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왕위에서 물러나야하는 것일까?

영국의 국법은 이혼한 여자가 영국의 왕비가 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왕의 퇴임사 중 “내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라면 나는 왕으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한 구절은 영국 국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도대체 어떤 여자 길래….”

왕의 연애 상대를 알게 된 국민들은 다시 한 번 경악했고 물러나는 왕에 대한 적개심까지 품게 됐다. “겨우… 미국 출신의 이혼녀야? 그것도 현재 유부녀 신분으로 심슨부인이라는 여자래… 정말 기가 막히는 군.”
“우리 대영제국의 왕이 연애 박사로 소문난 미국 이혼녀의 세 번째 남편이 된단 말인가? 정말 기가 막히는 노릇이군….”

영국 내각의 고관대작들, 왕실의 로열패밀리와 귀족들의 상심은 국민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했다. 왕의 ‘정신 나간 선택’은 보수 성향의 영국 상류층 사회에서 수치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법에 따라 왕위에서 물러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스탠리 볼드윈’은 “왕이 심슨부인과 결혼하려면 ‘중대한 결심’을 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전국이 술렁이고 온 유럽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드디어 1936년 12월 11일 왕은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겠노라”고 선포하고 만다.

사랑? 추문?

“전하의 바지와 신발이 잘 어울리는 것 같지가 않네요.”
화사한 웃음과 우아한 몸가짐, 아름다운 목소리의 심슨부인과 왕세자 신분이었던 에드워드 8세의 첫 만남은 이렇게 1930년 9월 영국의 한 사교모임에서 시작됐다. 에드워드 8세가 37세, 심슨부인이 35세였다. 친절하고 소탈하며 가난한 계층을 위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던 황태자는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애정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진 것은 3년 뒤인 1933년부터로 알려져 있다. 함께 스키여행을 다녀 온 1933년 에드워드 8세가 심슨부인에게 청혼했으나 결혼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1936년이 돼서도 둘의 은밀한,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연애가 이어졌다.

말 많은 서방세계의 잡지와 신문들이 연일 둘의 러브스토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애틋한 사랑으로 묘사되기도 했고, 교묘한 악녀의 주문에 꼬임 당한 순진한 황태자의 러브스토리로 묘사되기도 했다.

당시 영국 특수수사국과 미국의 정보국(FBI)은 각각 심슨의 정체에 대해 캐기 시작했다. 둘의 만남을 못마땅해 하는 측에서는 그녀의 흠을 들추어내려고 혈안이 돼있었다.

<나치의 스파이로 주영 독일대사의 정부(情婦)노릇을 하며 영국의 중대한 정보를 독일에게 전해주고 17번이나 독일대사와 동침했다> <알고 보니 더러운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 있더라> <유부남 자동차 세일즈맨과도 통정한 색녀에 바람둥이다> 등등 별별 추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한편의 증언들은 정반대였다. <매우 성실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사람> <심슨 부인과 함께해 보면 에드워드 왕이 왜 그녀에게 빠져들었는지를 금방 알게 될 것>이라는 평과 함께<결혼 전 그들이 함께 한 여행에서는 각자 투숙할 정도로 금기를 지켰고 어떤 선을 유지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것은 둘이 묵은 각각의 방의 침대 시트를 조사해 봤다는 한 승무원의 발언에서 나온 이야기다.

논란속의 결혼

세간의 온갖 추측과 소문, 가십이 난무하는 가운데 에드워드 8세는 심슨부인과의 결혼을 택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심슨 부인은 ‘법적’유부녀의 신분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심슨부인은 1916년 20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 해군 조종사 윈필드 스펜서와 결혼했으나 11년 만에 이혼하고 1928년 ‘브리턴 어니스트 심슨’과 결혼해 영국으로 건너왔다.

남편은 해운회사의 중역이었다. 어떻게 영국 상류층의 사교계까지 진출하게 됐는지 정확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남편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흔히 심슨부인이라 불리는 탓에 정작 본인의 이름인 ‘윌리스’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뛰어난 미인도, 관능미를 갖춘 여인도 아니었지만 특유의 부드러움과 따뜻한 기운을 간직한 여자였다. 보통 여성들은 에드워드 8세를 왠지 어려워하면서 거리감을 두고 있었지만 거리낌 없고 다정하게 말을 걸며 다가오는 윌리스 심슨은 왕세자의 눈에 뭔가 달라보였다. 친근감으로 시작한 그녀에 대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으로 바뀌어갔다.

왕세자와 심슨부인 그리고 부인의 남편. 이들의 갈등과 번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훗날 남편 어니스트 심슨의 증언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에드워드 왕이 1936년 초 아내를 사랑하며 결혼하고 싶다고 알려와 충격을 받았지만 결국 이혼에 동의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에드워드 왕이 왕위를 지키는 게 나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아내의 심리를 알기 때문이다. 확신하건대 내 아내는 에드워드 왕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누군가 고위층이 아내를 만나 설득하면 넘어갈 것”이라며 전 아내를 깎아내렸던 것이다.

1936년 1월, 영국 왕 조지 5세가 사망하자 맏아들인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에게 심슨부인과 함께하지 못하는 왕위는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퇴임 선언으로 왕위를 동생 조지 6세에게 물려준 에드워드 8세는 1937년 6월 3일 종교계, 수상 등 내각, 국민여론, 왕실의 극렬한 반대론자들과 조롱하고 비웃는 모든 사람들을 뒤로한 채 윌리스 심슨과 결혼했다. 로이어밸리의 조그만 성에서 불과 16명의 하객만 참석한 이 결혼식에서 둘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한다.

뒷이야기

왕위에서 내려온 에드워드 8세는 더 이상 에드워드 8세가 아니라 ‘윈저 공’으로 호칭이 달라졌다. 그들은 프랑스에 살았다. 1972년 68세의 윈저 공(에드워드 8세)은 후두암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다. 흔히 심슨부인으로 통칭되는 베시 윌리스 워필드 스펜서 심슨 윈저 공작부인(Wallis Warfield Spencer Simpson, Duchess of Windsor)은 1986년까지 살았다.

그녀는 죽기 직전 “내가 죽으면 윈저 공과 결혼할 때 입었던 옷을 입혀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녀를 내사한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그녀의 진정성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지만 ‘세기의 로맨스’의 주인공으로서 ‘윌리스 심슨 윈저’ 부인은 그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여인이다. 현대 미디어 상에서 로맨스 분야의 여왕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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