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어버이날이라고 혼자 사시는 친정어머니에게 간 아내가 하룻밤 자고 오겠다는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밤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제 오후에 갔으므로 저는 또 하룻밤 홀아비 신세는 면치 못하겠거니 생각하고 일찌감치 방에 불을 때고는 대충 저녁을 먹은 후에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는, 책상 앞에 앉아서 무얼 좀 써보려니 생각했었는데 늘 그렇듯이 저녁을 먹고 양치하고 들어와 잠시나마 누워 소화를 시킨다는 생각으로 텔레비전을 켜면 그게 채 삼십 분이 지나지 않아서 잠이 쏟아져버립니다. 그러면 글이고 뭐고 다 귀찮은 생각만 드는데, 그렇다고 마냥 그대로 잠을 자기에도 좀 거시기하곤 해서 까무룩 하고 잠에 빠지다가도 벌떡,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곤 하지요. 그래서 밤에 무얼 하려고 생각하면 부러 밥을 좀 덜 먹고 처음부터 아예 자리에 눕지 않는데, 어제도 그랬다가 결국엔 잠에게 또 지게 되어서 겨우 여덟 시 뉴스와 날씨만 보고는 잠자리에 든 것입니다.

좀 피곤하기도 했습니다. 아침 먹고 모판에 씨나락 종자를 치기 시작해서 쉬지 않고 꼬박 일했으니까요. 구부리고 하는 것이라 여럿이 덤벼서 얼른 해버려야 하는 일인데 한 필지 모판 120여 개 해내자고 사람 불러올 수도 없는 것이라 둘만 했었습니다. 힘 드는 것도 힘 드는 것이지만 못자리 농사를 짓는 일은 다른 일보다는 신경이 더 많이 쓰여서 피곤합니다. 기계로 해내면 그럴 일도 없겠지만 종자를 고르게 뿌리기란 늘 어렵지요. 이걸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서 나중 논에 모내기 할 때 때움 모가 생기지 않으니까요. 그러므로 꼼꼼하게 할수록 허리를 구부리는 시간이 많아져서 나중엔 지루한 생각에 몸이 더 녹초가 됩니다.

어찌어찌 일이 끝나서 뒷정리하고 씻고 점심 먹고, 오후에는 일하지 않았는데도 저녁에 일찍 떨어진 겁니다. 그렇게 얼마나 잤는가 싶은데 차 소리가 나고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양손에 무얼 잔뜩 들었는데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모종들이었습니다. 옥수수, 가지, 잎 당귀, 또 하나는 뭐라나 이름조차 생소한 것인데 쌈으로 맛이 좋은 거라더군요. 저는 속으로 ‘이 사람이 모종 사놓고 내일 아침 어서 심을 욕심으로 자지도 않고 그냥 달려왔구나’ 생각했습니다. 요즈음 친정에 가는 일이 잦아서 어제 제차로 버스 타는 데까지 바래다주면서 넌지시 “지금도 옛날처럼 친정에 가는 게 좋아?” 물었더니 “엄마 혼자 있으니까 가는 거지 좋기는 무슨….” 이랬으니까요.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친정어머니 모시고 시장에 나가서 편한 신발 한 켤레와 가방 하나를 사드리면서 모종들도 샀는데 친정어머니가 되레 등을 떠밀었다는군요. 공동체기숙학교에 다니는 애가 주말을 맞아 온다는데 집에 어미가 없어서 되겠느냐 라시면서요. 저는 그 말을 심상하게 들어 넘기는 척 안식구 앞에서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마음은 묵지근해졌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그 어머니가 아니던가요? 홀로 늙는 어머니가 젊은 딸을 새끼 거느린 어미로만 여겨서 당신의 어미 됨을 쓸쓸히 포기하는 경우라니! 아마도 이 세상 어머니들은 어미라는 이름위에 무슨 커다란 돌덩이 하나씩은 다 눌러가지고 계시지 않나 싶군요.

사실 어제 이 사람이 친정에 갈 때 돈 한 푼 주어 보내지 못했습니다. 제 통장은 늘 마이너스라는 이유로, 주에 한 번씩 조카가 하는 펜션에 청소 다니면서 용돈이라도 버니 그런 돈은 좀 당신이 쓰라고 떠밀었는데, 어제 바래다주고 돌아서 오면서는 저도 한 가닥 양심이 있어서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올해 못한 거 내년에는 곱빼기로 하마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말하는 저 자신에게 그게 다 사위노릇 못하는 것을 우선 면피하고자 하는 거짓부렁임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저는 그랬으나 제 아내는 틀림없이 봉투하나 만들어서 박 서방이 주더라며 장모님 손에 쥐여드렸을 것임을, 그래서 못난 남편을 더 못나게 하지 않을 것임을 알므로 예전에도 늘 그래왔으니까 면피라고 하는 게 금세 부끄러움으로 변하는 것 또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 외할머니를 …내 어머니는 좀 꺼려하기도 했지만, 그 사는 힘을 아무것도 안 보이는 하늘하늘 단둘이서만 상의해서 만들어가지고 산점에서는 서로 많이 닮았다 아니, 이건 여러 천년동안의 우리어머니들이 서로 모두 공통으로 지녀온 힘이었고, 이 힘이 크고 질긴 덕으로 우리 사내들도 과히 더럼타지 않고 그대로나마 지탱해 온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몸이 좀 찌뿌드드했습니다. 전국에 많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는데 아침 먹고 나니 벌써부터 몸에 신호가 와서 늘어지는군요. 하여 안식구가 모종 심어야 하니 경운기로 텃밭 한 두둑만 갈아달라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거름만 위에 뿌리고 대강 뒤적거려서 심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마음은, 어제의 그 미안한 마음으로는 제 몸이 아무리 피곤하대도 나가서 함께 모종을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 비 온다지만 이 맑고 푸른 아침나절에 아내랑 같이 모종 심으며 아들 녀석에게는 물을 주라고 해야 되는 것인데, 저는 이렇게 방바닥에 눌어붙어있다 겨우 책상 앞에나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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