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거실 문 옆에 놔둔 신발장 근처에서 곤줄박이 한 마리가 서성이는 게 며칠 전부터 눈에 띄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심하게 봐 넘겼는데 사람이 옆에 가면 그 근처 어디에선가 포르르 거리며 날아가곤 해서 아하! 새끼를 치려나보다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심하며 자세히 신발장을 살펴보니 안식구가 꼭 일주일에 한 번씩 꺼내 신고 해금을 배우러 가는, 그 신발 코앞에 둥지를 튼 게 보였습니다.

 새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신발을 들어내고 보니 아직 알을 낳지는 않았는데 달걀하나 쏘옥 들어갈 만치 작고 앙증맞고, 안에는 깃털이 깔린 둥지가 거기 있어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따뜻하고 어둠침침하여서 꼭 남의 신방을 엿보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제가 그 신방의 주인이 된 것 같은 순간적 착각에 빠져버렸다고나 할까. 저번 신발을 꺼내 신었다가 둔지 사나흘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 신방은 그사이에 만들어진 것이겠지요. 저는 신발을 그대로 다시 제자리에 놓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만저만하니 당분간 다른 신발신고 해금하러 다니소 잉?

안식구도 자기 신발 옆에 신혼부부가 깃든 게 여간 상서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듯했습니다. 여간해서 어떤 일을 밖으로 드러내거나 요란스러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오며가며 제가 남의 신방을 들여다보는 듯싶으면 나무라기까지 하니까요. 그러면서도 저희는 아직 그들 부부의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아 내심 가슴을 졸였습니다. 우리가 한번 들여다본 것을 어찌 알고 이사를 가려하나 하고요.

그러나 그 걱정은 그냥 걱정에 그쳤습니다. 어제 아침, 거실 문을 열고 나와서 신발 신느라 잠깐 구부슴하고 있던 새에 곤줄박이가 날아가는 게 보여서, 이 녀석은 바로 멀리 날아가는 게 아니고 일단 마당귀퉁이에 심어진 때죽나무 가지에 앉아서 둥지가 안전하다고 여겨지면 날아가는 거라 그러길 기다려서 다시 신발을 조심스레 들어내고 안을 살펴보니 파아란, 완두콩보다 조금 더 큰 알 하나가 낳아져 있던 거였습니다. 창공, 아니면 나무이파리 커튼 뒤에서 사랑을 하고 인간의 온갖 냄새를 묻혀 들이는, 하필 신발장임을 신경 쓰지 않고 둥지를 틀어 난 알이라니!

고마웠습니다. 하여 저희는 그 앞을 늘 조심하여 지나다니고, 둥지에서 눈을 깜박이는 그와 멀리서나마 눈이라도 마주쳐, 응원하고 있는 우리마음을 행여 전하여 질까 바라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본 것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산속 암자에 있는 스님의 손에 놓인 먹이를 새가 와서 쪼아 먹는 장면 말이지요. 그걸 보면서 ‘사람이 얼마나 무욕하면 새로 하여금 자연의 한가지로 여겨질 수 있나’ 싶어 한동안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있기도 했습니다.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생명가진 것이 나를 의지처로 삼는다 할 때 그것은 이미 특별한 관계가 생겼음을 뜻하는 것인 바, 그것만 한없이 지켜주고 감싸 안는 것에서 다시 차원을 넘어 전우주로 확장되는 그 무엇. 그것은 어떻게 이름 하여도 상관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새는 이미 새가 아니고 나는 내가 아닌 그 무엇일 뿐, 이제는 아무 거칠 것도 둥글지 않을 것도 없다 생각했습니다.

작년에도 박새 한 마리가 부엌 가동되지 않는 냉장고 위의 여러 잡다구지레한 물건들 사이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박새 이 녀석은 곤줄박이보다는 더 사람을 이물스럽지 않게 생각하는 듯 늘 부엌을 드나들며 우리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손이 닿을 듯한 거리까지 가도 날아가지 않고 둥지의 알을 지켰습니다. 다섯 마리의 새끼가 깨이고 열흘 조금 넘는가 싶더니 그야말로 모든 인연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새끼를 달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인연 있음과 없음 관계맺음과 맺지 않음이 똑같은 말이라는 것을 참 기분 좋게 증거하며 떠나간 것을 볼 때 도대체 우리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이 때로 얼마나 커다란 장애가 되는지, 그것도 한동안 참 많은 것을 생각게 해주었습니다.

판소리 다섯 바탕의 흥보가 중 눈 대목으로 치는 제비노정기를 들어보면 대명이(구렁이)의 아가리를 피해 용케 살아남은 새끼제비 한 마리가 날기 공부를 힘쓰다가 대평상에 뚝 떨어져 다리가 질끈 부러지자 흥보가 명태껍질과 당사실을 구하여 (그 주제에 어떻게 명태껍질과 당사실을 구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러진 제비 다리를 칭칭칭 동여매주고 부디 살아서 강남으로 잘 가라고 당부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런 흥부가 뭘 바랄 턱도 없지만 결과는 보은 표 박씨를 얻는 걸로 되어있지요. 이것은 창을 그리는 사람이나 우리사회가 보여주는 어떤 한계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요?

한가하게 새타령을 하는 사이에도 어느새 마당에 내어놓은 모판은 부직포를 밀어 올리며 퍼렇게 커오르고, 비록 삼백 포기밖에 심지 않은 고추지만 곁순을 한번 따주었더니 하룻밤 새 키가 벌써 줄을 매주어야 할 만큼 자라납니다. 그사이 감자밭도 풀을 한번 매주고 북을 주었더니 이제 완전히 순이 무성해져 땅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들깨 모종을 붓고 이른 깨와 이른 콩을 심으면 이제 오월도 하순이 되어 모내기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에 앞서 마늘도 뽑아야지요. 늦콩을 심고 고구마를 묻고, 힘닿는 대로 바쁘면 바쁜 대로, 또 한편으론 한가한 짬을 즐기며 요즈음은 물이 흐르는 듯 거침없이 시간이 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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