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예년 같으면 장마철인데도 장마전선은 저 아래 제주도 먼 바다에 머물기만 하고 좀체 올라올 줄을 모릅니다. 간간이 소나기 소식이 있었으나 말 그대로 논두렁 하나 사이에 두고 비켜만 가고 햇빛만 쨍쨍하더니 무슨 맘을 먹었는지 새벽에 소나기 몇 바탕이 천둥번개와 함께 내렸습니다.

그 양이 소나기라고 하기에는 좀 많다 싶지만, 날이 많이 가문 탓에 땅 속 깊게 적시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전에 밭에 들어가기에는 땅이 질었습니다. 해서, 망설이고 있는데 안식구가 얼른 콩을 심어버리자고 하는군요. 포트에 기르고 있는 콩인데 날마다 물을 주는 까닭에 많이 자랐습니다. 제 생각엔 다음 비에 심었으면 싶었는데 그 비라는 게 언제 올 줄 모르는 것이라 다시 생각해보니 그 말이 옳은 듯했습니다.

밭은 전전날 이미 잘 갈아서 다듬어진 상태입니다. 그 밭에 콩 모종을 차에 실어다 옮겨놓고 이쪽에서 저쪽 끝가지 줄을 떼고 콩을 심었습니다. 경운기가 낸 골을 따라서 심어도 되지만 그것이 일정하질 않기 때문에 줄을 떼는 게 좋습니다. 콩과 콩의 포기사이는 약 20센티미터, 이랑의 너비는 70센티미터입니다. 밭의 크기와 콩의 양을 계산해 볼 때 약 일곱 줄 정도 심으면 될 것이어서 나머지 땅에는 비 오기 전에 미리 팥과 녹두를 심어두었습니다. 콩 한 줄을 심는데 제가 3분의 2정도를 심고 안식구가 나머지를 심더군요. 저는 농담으로 아내더러 빨리 심으라고 다그칩니다.

포트에서 그냥 막 쑥쑥 뽑아서 심어도 괜찮다며, 저는 보란 듯이 손을 빨리 놀리는데 이 사람은 무슨 정성을 그렇게 들이는지 콩 한 포기 심기를 마치 갓난이 안고 어르는 듯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콩은 죽지 않고 잘 사는 것인데 무엇이 못미더운지 그 모양새입니다. 그러다가 한편 저를 보니 오히려 제가 너무 정성을 들이지 않는 것은 아닌지 순간 미안해집니다. 콩이 살고 죽고를 떠나서 모종을 옮기는 이 행위 자체에 겸손함이 결여돼 있지 않냐 하는 것이지요. 모든 것에 너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빨리 끝마치려는 욕심이, 농사가 가진 느림의 그 세심함을 잠시 잊었던 것 같습니다.

콩이 어느새 다 심어져서 홀가분해졌는데 아내가 이번엔 들깨 모종을 낸다고 합니다. 아직 들깨는 자라지 않아서 손톱 만씩 한데 오랜만에 비를 보자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지 일에 욕심을 냅니다. 그건 다음에 심어도 된다며 제가 역증을 내자 이 사람은 자기 혼자 심을 테니 걱정마라 합니다. 그러나 의리가 있어야 되는 것이어서(!) 들깨 모종도 같이 했습니다. 이 사람의 성격이나 속도로 보아서 시간이 얼마나 지나가든 기어이 끝내고 말 것이지만, 그렇게 혼자 하게 놔두느니 제가 조금 거들어서 그것마저 빨리 끝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들깨 모종도 몇 고랑 자알 끝냈습니다. 들깨는 다른 여러 가지 여름작물을 다 심은 다음에 밭둑을 따라가며 하던 것인데 지금은 아예 바탕을 잡아서 몇 두둑 심고 맙니다. 땅을 빈틈없이 이용하여 생산의 극대화를 노려야 했던 옛날과 달라서 지금은 키 낮은 작물과 키 큰 작물을 골박이로 섞어 심는 법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농사의 기술이 현대의 기계 기술에 의존하다보니 퇴화되거나 사라지는 듯해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로써 제 땅도 이제 온 밭에 가득 곡식이 심어졌습니다. 밭둑의 풀은 깎여서 단정하고 잘 갈아서 여름 곡식이 심겨진 땅들은 말쑥합니다. 앞으로 약 스무날 가까이는, 그러니까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때까지는 밭일이 한가할 것입니다. 여름지기, 그 땀 찬 나날들은 칠월 하고도 중순부터나 시작되겠지요. 잠시잠깐의 망중한입니다. 그러나 내일부터 저는 당장 논에 가서 살아야 합니다.

모내기 끝내고 나서 물관리가 쉽잖던 탓에 등 나온 곳에는 벌써 피가 얼마나 올라왔는지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아직 손에 잡히지 않은 정도라 조금 더 있다가 매도 되지만 어릴 때 한번 문대고 지나가야 나중일이 수월할 겁니다. 그러기 전에 또 한 번 논둑부터 깨끗하게 베어버려야 뱀 같은 것도 잘 꼬이지 않을 것이고요. 그래서 내일은 일단 예초기 가지고 가서 논둑부터 베어버리고 철렁철렁하게 물을 대야겠습니다.

씻고 점심 먹고 조금 쉬고 나서 아침나절에 옮긴 모종들이 안녕하신가 둘러보러 나갑니다. 헐렁한 반바지 차림에 반팔 남방셔츠에 밀짚모자 느슨히 쓴, 아주 한가한 폼이지요. 깨끗한 밭둑을 따라서 참 흐뭇한 마음이 되어 밭을 돌아봅니다. 그러다가 고추밭 고랑에 난 풀을 보고 그곳에 앉아 풀을 뽑습니다. 갈아입은 옷이 땀에 젖지는 않게 가만가만….

옛날 생각이 납니다. 우리 어머니도 저처럼 이렇게 일이 한가할 때면 보리밥물에 주물러 풀을 먹인 삼베 적삼 손바닥에 올려 손바닥 다듬이질해서 햇볕에 말렷다가 떨쳐입고 다시 텃밭에 앉으시던 그 나비 같던 모습 말이지요. 그건 농사꾼의 뭐라 할 수 없는 품위이며 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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