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가 넘도록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지요. 마치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 대신 술을 마시겠다는 생각으로 마음 놓고 마셔댔으니 오늘 성할 리가 없습니다. 제 사는 이곳 면지역에는 제가 몸담고 있으면서 책임을 맡고 있는 풍물단체가 하나 있는데, 그 회원 삼십여 명 중에 올해 환갑이 되는 분들이 일곱 분이나 있습니다.

어제 이분들의 합동 환갑 기념식 자리를 마련해 드리느라 그렇게 마셔 댄 것입니다. 당사자도 아닌 주제에 그랬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일을 추려내느라 딴엔 힘이 들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일주일 전부터 나머지 회원들을 찾아다니며 비용을 마련하는 일, 음식을 준비하고 기념식 프로그램을 짜는 일, 연락하고 진행 상황을 챙겨보는 일들로 제 일은 거의 손을 놔버렸는데, 이런 일은 농사와는 달리 혼자 하지 못하는 것이고 스트레스도 받는 일이라 술병 옆에 차고 다니며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일을 하면서 제가 느낀 것은 조직의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 결국은 설득해서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에 다름 아님을,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알다시피 지금은 옛날과 달라서 환갑을 쇠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기대수명이 워낙 길어진 탓에 농촌이건 도시건 나이 육십은 청년이라 해야 될 만큼 고령사회에 살기 때문인데요. 그래도 육십 한 갑자를 꽉 채운 것이라 그냥 지나치기 섭섭다고 기념여행정도는 떠나는 모양인데, 이분들은 그런 소식도 들리지 않고 한두 명이 아닌 일곱 분이나 돼서 쑥스러워 하는 당사들을 설득해내서 자리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계획했던 대로 일은 무난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다른 단체의 대표들도 오고, 회원들이 아니지만 주변의 친분 있는 분들도 오고, 의원과 조합장도 와서 축사를 하고, 서투르지만 우리가 마련한 축하공연도 원만하게 했습니다. 케이크를 자르고 축포와 샴페인도 터트리고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것을 본 후에 저는 그만 정신줄 놓아버리고 마시기 시작했지요. 마지막엔 몸을 가누지 못해서 한쪽에 쓰러져 누워버렸습니다. 그렇게 한숨 자고 겨우 정신 차리고 일어났더니 자리는 대강 마무리되고 뒷정리도 끝나가던 중이었습니다. 어찌어찌 집에 온 시간이 자정에 가까웠으니 초저녁잠이 많은 저로서는 하룻밤 잠을 날려버린 셈이기도 해서 더욱 일어나기가 힘이 들었을 겁니다.

나이 먹어서는 술 먹느라 자정을 넘겨본 일이 거의 기억에 없습니다. 많이 마셔도 일찍만 자면 아침에 그럭저럭 일어나고 밥도 먹고 일도 할 수 있는데 열시 열한시를 넘기면 너무 힘들어지더군요. 또 술이 깰 무렵 비몽사몽간에 느끼는 그 황폐해지는 감정을 감당하기도 힘이 들고요. 세상이 온통 회색빛 같은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것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런 상태를 만들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나 제 맘대로 못하는 음식이 술인 것이라 아주 가끔은 이렇게 홈런을 맞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날은 차라리 장맛비라도 내리면 좋을 텐데 오늘사 말고 날이 좋아서 방에 누워있기가 괴로웠습니다. 습도가 높은데다가 바람 한 점 없는 속에 해가 나니 방안도 점점 더워오지요, 기운 없는 몸뚱이에 끈적끈적한 땀이 온몸을 휘감아서 나중에는 억지로 일어나 씻고 밭을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장맛비 때문에도 거의 밭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일주일 사이 풀과 곡식이 함께 자라서 깨밭은 땅을 다 덮었고, 들깨 밭 들깨도 잎을 따먹어도 좋을 만큼 너벅너벅 커졌습니다. 떡잎만 남기고 고라니가 다 뜯어먹어버려서 못쓰게 돼 버린 줄 알았던 콩도 바로 떡잎에서 곁순이 나오고 있어 신기합니다. 다른 것과는 달리 아직 땅에 달라붙어 오종종한 모습이어서 나중에 구실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마디가 자라고 새순이 나오니 두고 봐야겠군요. 세 줄만 심은 고추는 벌써 익었습니다. 남보다 늦게 심었는데도 익기는 일찍 익었군요. 한그루에 붉은 것이 대여섯씩 되니 조만간 첫물을 따야 되겠지요. 그러려면 우선 비닐하우스에 검정 차광막부터 씌워야겠습니다. 고구마 밭도 순이 땅을 덮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풀이 장난이 아닙니다. 발 닿는 곳마다 일거리 아닌 게 없으니 사람 게을러질까봐 풀을 만들었다는 옛날 어른들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름 채소반찬 중에 물외만큼 많이 먹는 것도 드문데, 올해는 뭔 생각을 하느라 정신 놓고 있었는지 때를 놓치고 오이 한포기도 심지 못한 것이 오늘 같은 날 더 후회가 됩니다. 냉장고에 얼음 있겠다, 오이 하나 따 채 썰어서 냉국으로 밥 한 그릇 말아먹었으면 술로 더워진 이 속이 얼마간 가라앉을 텐데, 있어야 할 오이는 없고 세 그루만 있어도 먹을 건 충분한 가지만 열 그루나 심어서 쭉쭉 빠졌습니다.

저번에도 한 바구니 따서 식당 하는 분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또 한 바구니나 따게 생겼네요. 오후 다섯 시, 해는 아직 중천이어도 일할 맛은 나지 않아 내일부터는 들러붙어서 해야지, 해야지 각오만 다지는 것으로 끝내고 가지 따들고 마을에 내려갔습니다. 해변에서 조그마한 주막을 하는 형님 한분이 저번 날 내리미라는 그물로 손수 잡아 담근 새우젓 한통을 주셨는데 그 답 깜냥으로 가지를 드리러 갔습니다. 술 한 잔 먹으라는 그 형님 말씀이 무서워서 도망치듯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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