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의 그 바다를 느끼다…

한산도는 행정구역상으로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 속하며 통영에서 배로 30분 거리에 위치한다. 1593년 선조 26년부터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의 참패로 소실된 선조 30년까지 4년간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현재는 두억리에 제승당 유적지 6백여 ㎡에 제승당, 충무사, 수루 등 건물 26동이 설치되어 있다. ‘두억리’라는 지명은 한산대첩 당시 바다에 떨어진 왜군의 목이 억 개나 되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 세계 4대 해전에 빛나는 ‘한산대첩’
1592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閑山大捷)은 서기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제독의 살라미스 해전, 1588년 영국 하워드 제독의 칼레 해전, 1805년 영국 넬슨제독의 트라팔가 해전과 함께 세계 4대 해전에 빛난다.

이순신 장군이 1592년 5월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왜적의 수군을 격파하자 일본은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 80여척의 병선을 이끌고 다시 우리나라 해역으로 침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7월 7일 견내량과 학익진 전법을 이용해 왜군 병선 47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포획했으며 9천여 명의 왜군을 수장시켰다.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기 때문에 기동하기 쉽지 않은 견내량을 십분 활용했는데 왜군이 화포를 쏘기 어려운 견내량을 통과하자 마자 학익진 전법으로 포위, 전투 시작 1시간 만에 궤멸시켜버렸다.
반면 조선 함대가 치른 희생은 놀랍게도 사망 10여 명, 부상 100여 명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창칼에 의한 것이 아닌 총포에 의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3개월, 수세에 몰렸던 조선 수군이 일본에 가한 일격이었다.

■ 전국(戰局)을 바꿔놓은 학익진과 거북선
충무사에는 전라우수영 전진도첩이 남아있는데 직진과 예진, 원진과 방진, 학익진과 곡진 등 조선 전통의 진법들이 그려져 있다. 학익진도 매우 자세히 그려져 있다.
학익진은 U자형 대진법이었는데 7월 10일에는 안골포에 머물고 있던 왜적선 42척도 불태웠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은 수세와 공세, 유인과 섬멸, 도주와 역공, 포위와 역포위에서 신속한 전환의 위력을 떨쳤다. 이 ‘전환’ 이야말로 한산대첩의 비밀로 적의 주력을 넓은 바다 쪽으로 유인하며 도주하던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돌연 적 앞에서 방향을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치며 적을 포위하고 섬멸했다. 강도 높은 군사훈련과 대담성으로 작전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다.

우선봉 거북선, 좌선봉 역시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조선의 판옥선을 개량해 만들었는데, 노를 젓는 1층과 함포를 발사하는 2층으로 구성된 크고 높은 배로, 왜군이 쉽게 배 위에 뛰어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거북선은 돌격용 전투함으로, 구조는 판옥선과 비슷하지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철심이 박힌 거북 등딱지 같은 것이 있고, 그 아래 노를 젓는 사람과 포를 쏘는 포수가 있었다. 또한 뱃머리에 용머리와 도깨비 머리를 달고 있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2개의 돛이 기동력을 높일 수 있어, 적의 배 사이로 깊숙이 침투하여 접근전을 펼칠 수 있는 조선 수군의 최고 무기였다.

이같은 전법과 무기를 활용한 한산도대첩으로 왜적 수군은 거의 전멸하였으며 일본의 수륙병진계획은 좌절되었다. 견내량에 있던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김해로 달아났고 휘하의 장수들은 대부분 전사했다. 와키자카의 가신 마나베가 패잔병 4백 명을 이끌고 한산도로 들어갔으며 결국 할복 자살했다.
이순신 부대는 한산도로 들어가 적의 잔당을 추격하지 않았다. 적들은 모두 굶어죽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견내량은 잘 알려진 정박지였던 반면 무인도였던 한산도에는 식량이 없었으며 적들은 배가 없었으므로 바다로 탈출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한산대첩은 그때까지 육지에서 계속된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던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고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갖게 됨으로써 일본측은 바다를 통한 보급이 끊겼고 퇴로가 막혔다. 결국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시킴으로서 조선은 전라, 충청, 황해를 지켜냈고 반격의 교두보가 확보되어 불리하던 전국(戰局)을 유리하게 전환시킬 수 있었다.

■ 이순신 장군의 얼이 스며있는 ‘제승당과 숲’
한산대첩 이후, 한산도 두을포(현재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3도 수군 통제영이 설치됐다. 섬의 서쪽 해안 오목한 포구이다. 섬의 앞에 대혈도, 소혈도 두 섬이 있어 배를 감추기 좋고 파도를 막아주어서 내항은 늘 잔잔하다. 물길 경사가 완만해서 배들이 들고나기가 힘들지 안다. 수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것은 ‘편안히 기다리다가 피로한 적들을 맞는다’는 이순신 장군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선착장에 내려 오른쪽으로 가면 제승당 입구가 나타난다. 바닷가를 따라 길게 휘둘러 둥글게 굽이진 길을 걸어가며 바라보이는 숲은 소나무 숲이다.

그래서 바람이 없는 맑은 날에는 양산과 마실 물이 필요할 정도로 덥다. 숲바닥은 동백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고 길가엔 꽝꽝나무 관목으로 낮은 생울타리를 이룬다. 동백나무 열매를 바라보며 바다 내음을 맡으며 1킬로미터 정도 걸어가면 제승당 입구인 대건문이 나타나는데 2명의 인형 포졸이 지키고 있으며 팔손이가 넓은 잎을 펼쳐 자라고 있다.

영산홍이 뒤덮인 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걸으며 계단이 나타나고 커다란 푸조나무가 가로막고 서 있다. 왼쪽으로 꺾여 오르면 충무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거의 평지로서 제승당이 앞에, 수루가 오른쪽에, 충무사가 왼쪽 멀리 자리한다. 제승당은 삼도수군의 본영인 통제영이 자리하던 곳으로서 이순신 장군께서 거처하면서 난중일기 1491일 분 중 1029일의 일기를 쓴 곳이다. 제승당 너머에는 충무공이 활쏘기를 즐겨했던 한산정이 있다.

과녁은 조그맣게 만을 이룬 바다 건너 솔숲 가운데 자리하는데 웬만한 사람이 쏘아서는 근처에도 못갈 정도로 멀었다. 놀랍게도 과녁까지의 거리는 145미터다.
이순신 장군 정신은 ‘멸사봉공의 정신’, ‘창의와 개척정신’, ‘유비무환의 정신’이다.
국립산림과학원 임주훈 박사 
정리=성낙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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