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날을 두고 비가 많이 온 탓에 여름내 달구어진 땅의 열기가 식었는지 잠깐 구름사이로 파아란 하늘이 보이고 한 무더기 바람이 지나가자 기분 좋은 신선함이 몸에 감깁니다. 마당을 벗어나 텃밭에 발을 디디다 말고 저도 모르게 아-가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여름 소나기 그친 뒤에나 초가을에 자주 보이는 희디흰 뭉게구름이 근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처서 지난 무렵의 정취를 온몸에 빨아들이며 느끼려고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깁니다. 당나라 때 어떤 시인은 떨어지는 한 잎 오동을 보고 천하의 가을을 알았다고 했는데 제 뜰에는 오동이 없군요. 그렇다고 하여 가을을 모를 것도 아니지만 갑자기 오동 한그루를 심어야겠단 생각을 합니다. 시인의 흉내가 아니라 오동이 있는 뜰은 삶의 냄새가 더 많이 날 것 같은 생각, 베어서 장롱 만들어 딸을 시집보냈던 옛 어른들의 사는 모습만 떠올려 봐도 어쩐지 가슴이 훈훈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한가한 생각은 밭을 한 바퀴 둘러보는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발밑에 무언가가 흙을 파헤친 흔적이 있어서 무심코 지나쳤다가 군데군데 다시 그런 곳을 발견하고서야 자세히 살펴보니 멧돼지의 흔적이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바삐 고구마 심은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고구마 한 두둑이 삼분의 일정도 파헤쳐져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봄내 여름내 멧돼지의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저녁에 연결하고 아침에 끊는 것이 귀찮아 전기목책기의 전원코드를 뽑아두었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몇 년 전의 피해에 비하면 그 정도가 적다는 것이랄까. 하지만 여기저기 밭을 헤집고 다닌 흔적으로 보아 한 마리가 아닌 듯하여 한 번 더 멧돼지가 내려오게 둔다면 고구마의 수확은 장담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바쁜 일이 있어 잠깐 볼일 보러 차타고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우선 목책부터 정비했습니다. 목책이 둘러 처진 밭둑의 경계를 따라 풀을 베어 전기의 방전을 막고 목책기의 선이 느슨하게 늘어진 곳은 조이고 컨트롤박스의 작동 여부도 살폈습니다. 별다른 이상이 없어서 한나절의 수고로 멧돼지는 물리친 걸로 생각했습니다. 모든 세상일이 이렇게만 된다면 무슨 걱정이겠습니까만, 목책기를 작동시킨 이튿날 밤에도 멧돼지는 내려와 무른 땅을 마음껏 파헤치고 연한 고구마를 터지게 잡숫고 돌아가셨습니다.

목책기의 전기 충격을 견디고 이겨낼 만큼 저희 집 고구마가 맛있었기에 그랬겠지요 아마. 그나저나 이것 참 낭패입니다. 전기목책기도 무서워하지 않는 저 밤손님들을 어찌해야 할는지요. 옛날처럼 산막을 짓고 앉아서 밤을 새우며 놋대야를 두드려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려면야 할 수 있겠지요. 산막대신 트럭 세워두고 음악이라도 크게 틀어서 지킨다면 다른 곳으로 비켜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찌된 셈속인지 피해를 눈앞에 두고 보면서도 그렇게 하기가 내키지 않더라고요. 고구마 몇 두둑에 생사가 걸린 것도 아니지만 새벽에 올지 밤중에 올지 모를 것을 두고 차 속에서 밤을 꼬박 새우기란 수월찮은 것인지라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사실은. 잡아 죽이지 않으면 그런 것이 다 임시방편이라 여겨져서요. 한 두 번이야 놀라 달아난다지만 고구마 같이 멋있는 먹이의 유혹 앞에 멧돼지는 멧돼지 식으로 막무가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걱정은 깊어집니다. 지금은 김장 채소와 양파모판을 만들어야 할 때인데 멧돼지의 주둥이가 거기까지 미칠까 두려워서요. 특히 양파는 균핵병 때문에 삼년간 심지 못하다가 올해는 한번 해보려고 종자를 사다놨습니다. 몇 년을 두고 고추와 양파를 하지 못하니 밭에서 돈 될만한 작물이 없더군요. 그래서 삼백평정도만 힘 부치지 않게 심어보려고 농협에서 세 깡통을 샀습니다. 종자 값도 비싸서 한 깡통에 팔만 원짜리 샀는데 멧돼지가 아휴- 그 모판에서 한번 블루스를 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생각하기도 싫은 참상일 게 뻔해서 모판설치를 앞두고 이렇게 골치 아픕니다.

잠깐 옆에 사시는 형님 댁 사정을 살피러 가봤습니다. 아직 대궁을 자르지도 않은 수수모감지가 하도 비가 잦으니 선 채로 곰팡이가 피고 싹이 난다며 형수님은 그중 성한 것을 골라 볕에 펴 말리는 중이셨는데 멧돼지가 형님네 고구마 밭에도 은혜를 베풀어 일찌감치 수확을 마무리하게 한 상태였습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둘이서라도 멧돼지 성토대회를 아니 열 수가 없었는데 그 순간에도 이놈들은 어느 산속 바위 밑에서 귀 막고 낮잠이나 즐기겠지요. 바짝 산 밑에 밭들이 있는 덕분입니다. 그러니 멧돼지서부터 고라니 꿩 비둘기에 이르기까지 따지고 보면 그 피해가 참 만만찮습니다. 별 뾰족한 퇴치방법이 없으니 답답하지요. 꿩이나 비둘기는 총 아니면 약으로 상대해야 하는데 둘 다 썩 내키는 방법이 아닙니다.

서로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비가 그친 뒤 낮게 드리운 산안개 속에서 우는 꾹꾹대는 비둘기 소리도 듣기 좋은 것이고, 이른 봄의 번식기에 몸치장을 하고 목청을 높이는 장끼의 모습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주 어린 고라니 새끼의 눈동자와 그 앙증맞은 모습은 인간세상의 것이 아닌 착각이 듭니다. 이런 것들이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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