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에서 만난 토종닭으로 인생 2막 열어

인생사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해서 흔히들 새옹지마(塞翁之馬)라 일컫는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잘 나가던 시절이 평생 갈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절망의 나락의 떨어지는 것이 바로 인생사인 것이다.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에 소재한 현화농장 임남섭 대표는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를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농사꾼이다.

지난 1990년대 경기도내 손꼽아 주는 산란계 대농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이 경제적 여유도 넘쳤다. 그러던 그에게 가금티푸스 질병이 엄습했다. 당시 10만수의 산란계를 사육 중이었지만 가금티푸스로 인해 몰살했다. 거기다 1만수의 산란종계장도 티푸스로 몸살을 앓았다.
불과 2년만에 남부러울 것 없던 대농에서 졸지에 빚잔치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가는 닭들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감당할 수 없는 사료값에 약품비 등 부채금액만 쌓여 갔다. 

“덩치 큰 것들을 정리하고 보니 2억원 정도 남았죠. 이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막막한 상황에서 산란계에 다시한번 도전하고 싶은 오기가 생겼죠. 충북 음성에 5만수 규모의 빈농장에 임대로 들어갔죠.”
그는 두번다시 쓰러지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그에 의지는 녹록치 않은 현실에 또다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또다시 티푸스가 창궐해 농장을 초토화시켰다. 2년도 못 버티고 그나마 가진 돈 2억원을 고스란히 날렸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그나마 남은 것은 그를 돕고자 하는 지인들뿐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계분차를 운행하게 됐다. 2년여 동안 심기일전하던 차에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이 또한 꼬였다.
또다시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농장터로 쫓기 듯 들어와 토종닭과 연을 맺게 됐다. 사료대금은 산란계농장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사료회사에서 외상으로 지원해 줬다. 그해 그는 5만수의 토종닭을 사육해 1억원이 넘는 소득을 올렸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었죠. 1990년부터 1999년까지 정확히 10년동안 줄곧 내리막을 달리다가 처음으로 돈을 벌게 됐으니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죠. 3년간 토종닭 사육으로 남아있는 부채를 전부 갚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2년 말부터 토종닭시장이 요동을 쳤다. 토종닭 1마리에 500원에 판매되는 웃지못 할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상인들의 농간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심정으로 토종닭협회 결성에 적극 힘을 보탰다. 2003년 9월 농가들의 결집된 힘으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전국토종닭연합회’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사육농가들을 중심으로 토종닭연합회가 결성되면서 상인들의 농간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시세를 파악할 수 있어 농가들이 정당한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 큰 성과입니다.”
임의단체로 머물던 전국토종닭연합회는 지난 2009년 (사)한국토종닭협회로 변경되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임 대표는 토종닭 사육에만 전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형 육계 계열회사들이 토종닭산업에 뛰어들면서 토종닭 사육농가들도 육계농가처럼 단순 위탁농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임 대표는 “계열사들이 자체 생산 70%, 외부 구매 30%를 유지해 준다면 토종닭산업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서 “계열사들이 일방적으로 사육규모를 늘릴 수 없도록 협회에서 감시자 역할을 해준다면 토종닭농가들이 단순 위탁농으로 전락할 위기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토종닭산업은 단기간에 눈부신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토종닭협회를 중심으로 농가들이 결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이제 살만하다고 게으름 피우기보다는 더 많은 관심과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열정과 의욕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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