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일찍 든 탓에 추석이 지났어도 별다른 느낌이 없더니 간밤에 비가 한 번 내리자 날씨가 맑고 서늘해져 이제야 비로소 가을이 온 듯 한 느낌이 듭니다. 다른 때 같으면 추석 전에 김장배추 옮겨심기며 양파 모판설치며 부지런한 사람들은 마늘까지 다 심어버리는데, 추석 지난 지금도 이런 일들은 한창인 듯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일교차도 많이 벌어져서 방에 불을 넣지 않고는 이불하나로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뜰에 다알리아가 피고, 마당을 맴도는 고추잠자리의 날개에 햇살이 부서지는군요. 뒤란 화장실 가는 길에 꽃무릇은 꽃대를 밀어 올려 선연한 붉음을 뽐내고 화단의 화살나무는 단풍이 듭니다. 이렇듯 곳곳 처처가 갑자기 한꺼번에 가을이 된듯해서 이제 굳이 그것을 찾아 나설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올해엔 마지막이지 싶습니다. 논둑 풀을 깎는 일말이지요. 딴 때는 추석 전에 사람 이발이나 한 듯이 말끔하게 풀을 깎고 나서야 명절을 쇠었는데, 올해는 그리 못해서 근 20여일만에 어제 논을 가서 둘러보고 논둑을 깎았습니다. 벼이삭이 오래전에 패서 벌써 노랑 방울이 들기 시작하니 벨 날이 가까워지는지라 깎지 않아도 되지만 사람들 오며가며 바라보고 개운해 할 것 생각하면 두어시간의 수고도 괜찮은 것 일겁니다. 돌아와서는 비닐하우스 안에 널어둔 깨를 털었습니다. 여문 것이 형편없다며 아내가 신통찮아 하는데 깨 여물들 무렵의 날씨를 생각하면 이마저도 다행 아닐런지요. 다 된 깨가 밭에서 썩는 통에 그냥 로타리 해 버린 사람이 참 많았거든요.

점심 전에 끝낼 수 있겠다며 녹두도 땄습니다. 녹두는 두 번째 따는데 그새 짐승들이 얼마나 쪼아 놓았는지 땅바닥에 녹두 꼬투리가 수북수북 했습니다. 꿩과 비둘기들이 반타작도 더해 버린 것입니다. 웬만하면 견디고, 되는대로 거두려니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분통이 터져서 안식구더러 공기 총하나 사서 내 이것들을 사그리 잡아 버리겠노라고 몰강스럽게 말했습니다. 꿩고기는 엄청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꿩 잡아 꿩 탕해 줄 테니 총 사는데 돈 좀 보태 달랬더니 아내가 배시시 웃습니다. 그리고는 금방 이런 걱정이 생겼습니다. 얄미운 그것들 잡는다고 총소리내면 다른 새들도 얼씬거리지 않을 텐데 그건 어떻게 하지? 아내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피해는 늘어가니 난감하군요.

오늘은 저희도 배추를 심었습니다. 구멍이 커다란 포트에 씨앗을 넣었던 덕분에 이렇게 늦게 심어도 괜찮은 듯합니다. 아침엔 씌어둔 비닐위에 이슬이 너무 많아서 호미에 흙이 달라붙어 심지 못하다가 10시쯤이나 되어서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호미에 흙이 달라붙어 일하기가 편찮지만 300포기 밖에 되지 않은 것이라 아내와 제가 마주앉아 이내 금세 심었습니다.

 저는 호스 늘여서 물 끌어다 주고 물 주어진 포기마다 안식구가 흙을 채워 눌러서 모종을 고정합니다. 심어놓은 배추 모종을 그새 귀뚜라미가 몇 포기나 잘라놔 버렸습니다. 굼벵이나 거세미처럼 보기에도 흉하지 않은 놈이 행동마저 어찌나 날쌘지 끊어놓고는 사람이 다가가면 톡톡 튀어 달아나 버리지요. 그거 몇 마리 쫓아서 함께 뛰다가 속으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무는 추석 전에 심어서 조금 자랐는데 벌레가 먹은 게 많아서 빈 땅에 다시 종자를 넣었습니다.

한나절 맑은 햇살 아래서 참 오랜만에 저희 내외는 평화롭게 일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집안 욕실, 저는 집 옆 냇가로 씻으러 갑니다. 이맘때가 냇가에서 씻기 참으로 좋은 때입니다. 여러 날 잦았던 비에 큰물이 져서 냇가에는 썩은 낙엽하나 남아있지 않아 그야말로 옥류입니다. 물도 아직 차지 않고 숲속에 부는 바람은 선선하기만 하니 더워진 몸을 씻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그래도 냇물에 오래있으면 이내 볕이 그리워서 알맞게 달아오른 판판한 냇돌에 나가 서 있습니다. 바람은 사타구니를 간질이고, 한낮의 나무그늘은 자꾸만 햇빛을 밀어내면서 길어져서 다시 햇볕이 쪼이는 곳으로 옮기다가는 냇물에 또 발을 담그곤 합니다. 먼지 한 톨 없는 이 청량한 산속의 가을 냇가가 잠시나마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데 충만한 자유를 느낍니다. 이것은 제 정신의 깊은 고향인 셈이어서 언제 어디서건 늘 마음이 이곳에 있습니다.
오후에는 다시 밭에 가서 앉았습니다. 콩밭속입니다.

 풀을 두 번 매 주었는데 이랑사이를 넉넉하게 벌여 심었더니 콩잎이 그걸 다 덮지 못해서 바랭이가 많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여름과는 달리 이제 이 풀은 그리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러긴 해도 콩 거둘 때까지 놔두면 그것도 많이 보기 싫고 나중일이 깔끔하지 않을듯해서 아예 매 버릴 생각입니다. 이런 일은 참 하기가 쉽고 편합니다. 이런 저런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 당장 마치지 않아도 마음에 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저 아무생각 없이, 힘닿는 대로 하는 것이라 정신의 휴식이며 육체의 유희입니다.

여름의 뜨거운 햇볕아래서도 다른 것과는 달리 콩밭 매는 일은, 깨끗한 땀을 흠뻑 쏟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콩잎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두벌 김 맬 무렵쯤이면 숨이 턱턱 막히지요. 온 몸을 던져서 일을 할 때는 차라리 그런 것이 더 좋습니다. 하물며 높고 푸른 가을 하늘아래 이 선선한 바람 속에서야, 쉬고 일하고 먹고 자는 것의 경계가 그리 크게 구분지어지지 않은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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