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배추 300포기 심은 것 중에서 거의 반가량을 다시 심어야 했습니다. 심고 나서 돌아서 서너 발자국도 떼기 전에 귀뚜라미가 먼저 배추 모종을 끊고 갉아먹더니 그 뒤를 이어 거세미 굼벵이 나비유충들이 만찬이라도 벌이듯 다투어 모종들을 망쳤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한번씩, 돌아볼 때마다 잎이 시든 것을 뽑아보면 뿌리부분이 싹둑 잘려있거나 갉아먹어버려서 거의 20여포기씩 그 자리에 다시 심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모종이 남아 있는 유기농가들이 있었기 망정이지 모종을 구할 수 없었다면 지금쯤은 배추 없는 배추밭이 될 뻔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종 때울 때마다 땅을 파헤쳐서 굼벵이 거세미를 잡아내지만 어디서 이렇게 끊임없이 생기고 자라서 배추를 괴롭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올해 더 유난스러운 까닭이 무엇 때문인지 짐작이 가긴합니다. 비가 자주 오는 날씨와 여러 가지 바쁘게 계획된 일 때문에 추석 전에 배추밭에 비닐을 미리 씌어놓았는데, 그러고 나서 20일 가까이 모종을 옮기지 않는 동안 따뜻한 비닐멀칭 속에서 이러한 벌레들이 많이 생겼을 것 아닌가 하고요. 사정이 이러니 진작 쑥쑥 자라서 땅을 덮어야 할 배추는 아직도 모종상태로, 땅 맛을 모른 채 누렇습니다. 일조량이 많지 않은 산속이라 해마다 다른 사람들보다 일주일 정도는 일찍 모종을 내는데 지금 상태라면 속이 꽉 찬 배추로 키워질지 염려되는군요. 줄기 시퍼런, 속 덜 찬 배추가 김장해 놓으면 맛이 더 있다고는 해도 여자들은 우선 속 찬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중에 구시렁댈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요.

배추는 이렇게 싹수가 노래도 담장의 호박 넝쿨은 참으로 기세가 좋습니다. 처음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은 곳이라 비실대며 겨우겨우 담장을 기어오르더니 한번 힘을 얻기 시작하자 금세 담장을 다 덮어버리고 줄기가 다시 땅으로 내려와 연한 호박을 맺히고 키우기에 정신없습니다. 호박 한포기에 달린 호박이 크고 작은 것 합해서 다섯 개나 되는데 어른주먹만 씩 한 호박은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들여다 볼 때마다 속이 다 비칠 듯 새파랗고 연한 모습이 꼭 곱으로 크는 것 같습니다. 저걸 다 먹지 못하니까 따지 말고 늙게 해야 하지만 이제 늙을 시간이 별로 없어서 중늙은이 호박이나 되겠지요. 그렇다면 썰어 말려야 하는데 그러기엔 또 때가 이릅니다. 호박 썰어 말리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 때여야 해서 지금은 이도저도 아닌데 호박은 그런 것은 제 알바 아니라는 듯 거침이 없습니다.

저희 집으로 들어오는 길 한쪽은 산과 닿아 있는데 그곳에는 산밤나무가 한그루 있습니다, 다른 큰나무들의 힘에 눌려서 가지 하나를 겨우 길 쪽으로 뻗고 있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 자리에 밤송이를 참 많이도 달았습니다. 제 차가 지나갈 때마다 스치는 정도이니 길 쪽으로 가지를 내민 정도를 짐작하시겠지요. 사흘 전에 밤송이 하나가 벌어졌습니다. 마침 밖에 나갔다가 아들놈과 함께 들어오는 중에 밤송이 벌어진 게 눈에 띄어서 차창으로 손을 뻗어서 알밤을 얻었습니다. 한 송이에 딱 하나가 들어있는 동글동글한 통밤이었습니다. 보통 밤은 송이 하나에 세 톨이나 두 톨이 들어있습니다. 세 톨이 들어있는 경우엔 가운데 것은 양면이 납작하고 바깥쪽 것은 한쪽만 납작한데 통밤은 양옆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저 혼자만 크는 거라 상수리처럼 동글동글 합니다. 저는 아들녀석에게 밤을 빌어서 난형난제를 설명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통밤을 빌어서는 배려와 절제 없는 요즈음 아이들을 빗댔습니다만 밤 껍질 벗기기에 정신이 팔린 녀석의 귀에 아비의 말은 공염불일게 뻔합니다.

요즈음은 등산객들이 참 많습니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산을 찾아 들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외따로 오는 분들은 드물고 거의 둘, 셋 이상으로 무리를 이룹니다. 산의 나무들은 아직 단풍으로 물들 생각이 없는 듯 한데 사람이 먼저 단풍 물들고 싶은지, 차림차림이 하나같이 알록달록 울긋불긋 입니다.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들고 두 옥타브쯤 높은 목소리로 깔깔거리며 한 무리의 아줌마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저희 집을 지나쳐 가는 것 같기에 밖에 나와 봤더니 7~8명의 사람들이 총천연색 옷차림이었습니다. 나뭇잎들이 만들어내는 초록의 바다 위를 바람을 담뿍 받은 돛배가 떠가는 듯 그런 둥실함을 느끼면서 약간의 현기증이 밀려왔습니다.

낯모르는 저 사람들의 뒷모습을 쫓아서 취한 듯, 어린 듯 저도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무 그늘 밑이나 냇가의 돌에 걸터앉아 낯모르는 것에 대한 긴장과 신선한 새로움으로 한나절쯤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산에는 지금 으름이 한창 익어서 그 서릿발처럼 하얀 속살을 내보이고 있겠지요. 작취미성, 머리가 아파 한참 만에 다시 방에 들어와 누웠습니다. 옆에 사는 둘째 형수님의 환갑이라고 형제들과 조카들이 모두 모여서 어제 저녁 무렵부터 잔치가 벌어졌는데 물 만난 물고기처럼 술을 숨 쉬었다고 해야 할까요. 안식구의 눈치에도 사뭇 아랑곳없이 마셔대고는 나중에는 반쯤 망가져서 막춤가지 보여줬던 것 같은데 추태였을 게 뻔합니다. 술 때문에 부대낄 때의 이 괴로움과 아찔한 추태의 장면 장면을 복기 할 때의 몸서리를 미리 알았다면 다시는 술을 먹지 않았을 것을, 후회는 늘 나중의 일인 것이어서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