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빈민, 농민의 `에비타`....성녀인가?악녀인가?

  
 
  
 
남미대륙 남동부에 위치해 한반도 면적의 13배가 넘는 드넓은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아르헨티나. 1810년에 이르러서 스페인에게서 독립한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한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오르면서 엄청난 변혁을 겪게 된다.

이 이야기는 아르헨티나 격동의 시대에 젊은 나이로 후안 페론과 결혼,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 되면서 가난한 자와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을 위한 ‘극단적인’ 복지정책을 추진했던 ‘에바 페론’ 이라는 여성의 ‘빛과 그림자’를 그렸다.


하룻밤 어때요?

“괜찮으시면 오늘 저와 함께 있는 것 어때요?”
후안 페론 대령은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50대의 홀아비인 자기와 함께 밤을 보내자는 이 아가씨는 이제 겨우 24살의 엄청난 미녀다. 말솜씨도 좋고 매너도 세련됐다.

페론 대령은 그녀의 의도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 아가씨의 마음이 바뀌지 전에 허겁지겁 자기의 집으로 데려가는 게 급했다. 후안 페론은 1943년 군사쿠데타로 정부를 전복하고 군사정권의 핵심요직으로 있었는데, 이때의 대통령은 사실상 허수아비였고 후안과 측근의 군인들이 정국을 좌지우지 했다.

이 아가씨의 이름은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한 라디오 방송국의 성우였다. 목소리도 좋고 달변이었다. 에바는 1919년 팜파스 지방에서 대지주였던 아버지가 가정부를 범해 태어났다.
14살 때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무작정 가출을 하면서 마을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유명한 영화배우가 될 거야. 두고 봐 아르헨티나 최고의 여성이 될 테니.”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작은 배역이라도 얻기 위해 별의별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1937년에 가까스로 역을 하나 얻었는데 그것을 위해 ‘성(性) 상납’도 서슴지 않았다. 시골 출신의 풋내기 여배우 지망생은 도시의 막강한 영화자본가들에게 노리개에 불과했던 것이다.

몇 년 후 에바는 라디오 방송국 성우로 들어간다. 그날 밤의 운명적 만남은 에바와 후안페론이 지진희생자들을 위한 자선모금행사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벌어진 일로, 때는 1944년이었다. 페론 대령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반했다. 그녀는 페론대령이 자기에게 반했음을 직감했다. 자연스레 페론에게 접근한 에바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후안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아 놓고 건곤일척의 미끼를 던진 것이었다.

여전사 (女戰士)

후안은 당장 에바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하룻밤을 보낸 뒤 이런 저런 복잡한 여자관계를 당장 정리하고 오로지 에바에게만 집중(?)했다. 그러나 명문가 출신의 유력자 후안은 에바와의 결혼까지는 선뜻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냥 정부(情婦)로 족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에바를 진정한 동반자로 여기게 되는 계기가 발생한다.

“세계대전이 미국과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어. 우리에게는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야.”
당시 아르헨티나 카렐 발카르세 정권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편을 들었다.
승리국 미국은 종전 후 아르헨티나 정권을 압박했다. 카렐 발카르세 정권은 민정이양을 약속했고 아르헨티나의 군부실세들이 수세에 몰렸다. 후안의 입지도 크게 흔들렸다. 대표적인 군부 실세요, 대미(對美) 강경파였던 후안 페론은 이때 가택연금을 당했다.

“후안, 당신을 아무 것도 못하는 식물인간처럼 내버려 둘 수 없어요. 당신은 좀 더 큰일을 해야 하고 아르헨티나의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하는 사람 이예요.”
“뭘 어쩔 수 있겠소. 이렇게 꼼짝없이 감금된 사람이….”

“당신을 감금됐지만 저는 아니에요. 두고 보세요.”
에바는 우선 후안의 추종자들을 포섭했다. 목숨이라도 내 놓을만한 후안의 추종자들이 꽤 많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호소했다. 달변에 설득력 있는 보이스는 그들을 감명시켰다.
“자~ 후안은 언제나 노동자 편에 섰던 사람입니다. 노동자들도 그런 부분을 잘 알고 있어요. 우선 노동자계급을 파고들어 그들의 총파업을 유도해 봅시다.”
젊은 요부로만 알고 있었던 에바는 그들의 눈에 열정적이고 전략적인 여전사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26세의 영부인

에바와 후안의 추종자들은 밤낮 가리지 않고 노동자조합의 간부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어디든 갔고 어떤 위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서슬 퍼런 정국에, 감금돼 있는 위험인물을 도우려고 쉽게 봉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후안의 권력과 위치를 보고 그에게 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사상과 정치적 가치. 언제나 민중과 노동자 편에 섰던 그의 발자취를 흠모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후안이 살아야 아르헨티나가 살고, 여러분이 삽니다.”

에바는 천재적 웅변가이기도 했다.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메아리 친 에바의 호소는 큰 반향으로 나타났다. 마침내 전국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확실한 입지를 다진 후안은 연금에서 풀려났다. 에바의 비범한 능력과 자신을 향한 헌신적 사랑에 감명 받은 후안은 에바를 정식 배우자로 맞이한다. ‘에바 페론’의 탄생이었다.

1946년 2월 후안 페론은 54%의 지지를 얻어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된다. 에바 페론은 26세에 영부인이 됐다. 영부인이 된 에바는 정책 결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녀의 정책은 가난한 도시빈민들과 저임금 노동자들, 자본가의 횡포에 시달리는 서민들과 농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외국자본을 추방하고 대외 자립을 표방한 ‘복지주의의 확대’가 핵심 정책이었다.

페론 집권 초기, 과감한 복지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자금은 당시 농축산물 수출 호황으로 돈이 쏟아져 들어오던 아르헨티나 경제의 승승장구 덕분이었다. 노동자, 여성들을 위한 입법이 강화되고, 공업화 정책이 강력히 추진됐다.
에바는 자기 이름으로 재단을 설립해 전국의 가난한 마을에 병원, 학교, 고아원을 무상으로 지어줬다. 누군가, 어디선가 필요하다고 하면 순식간에 처리해 줬다.

에바와 후안 페론 부부에 대한 지지율은 점 점 더 올라갔다. 1951년에는 67%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재선할 수 있었다. 에바는 손이 점점 더 커져 복지정책의 예산을 점점 늘여갔다. 그럴수록 대부분이 가난한 민중이던 국민들의 지지는 높아져 갔다. 그녀를 성녀로 추앙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모든 게 돈 아니던가. 아르헨티나 국고는 ‘화수분’이 아니었다.

요절, 후안의 몰락

후안과 에바는 점점 권력과 민중의 환호에 도취돼 갔다. 이들 부부는 에바의 자서전을 스페인어 교재로 만들어 전국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등 우상화 작업까지 진행했다.
그러나 에바는 하층민의 판자집, 더럽고 위험한 작업현장, 거친 노동현장, 병으로 신음하면서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가난한 이웃을 직접 찾아다니며 용기를 주었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이런 행보는 계속 홍보됐고 사람들은 그녀를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칭송했다. 홍보나 포퓰리즘 이라기엔 그녀의 행동이 너무 진실해 보였고, 일정이 살인적이라 할 만큼 힘든 것이었다.
1951년부터 군부와의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군부는 에바를 견제했고 후안에 대한 반감도 커져갔다. 군부는 자본가들과 강한 유착관계에 있었다.

1952년, 에바가 쓰러졌다. 척수백혈병과 자궁암이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발견된 것이다. 50년대 중반부터 악화된 경제사정은 에바의 복지정책을 지원할 수 없었고, 급기야는 일부 노동자 계층에서까지 에바의 노선에 반대하고 나서던 시점이었다. 에바는 크게 상심해 있고 마음 고생하다가 34세의 너무도 젊은 나이에 눈을 감고 만다.

전국이 울음바다에 잠겼다. 에바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무려 한 달이나 계속됐다.
에바가 죽은 후안은 무력했다. 후안의 정치는 에바의 정치였던 것이다. 그나마 계속되는 경제난 속에 에바까지 없자 후안의 인기는 급락했고, 1955년 9월 로나르 장군의 쿠테다로 쫓겨나 스페인 망명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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