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의 일교차가 15도 이상 벌어지는 날이 며칠 이어지자 산과 들은 비로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왔다는 듯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기 시작합니다. 먼 산마루의 능선과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단풍도 아침저녁으로 새 옷을 갈아입은 냥 색이 점점이 붉어지고 집 옆의 붉나무, 옻나무 따위와 느티나무들도 뒤지지 않겠다는 듯 물들어가는군요. 특히 감나무의 감들이 이젠 퍼런 잎 뒤에 숨어 있기 싫다고 제각기 고운 얼굴들을 내미니 그 앞에서 뽐낼 다른 과일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요샌 아침저녁으로 집 주변에 있는 스무그루 남짓 되는 감나무 밑을 한 바퀴씩 도는 게 낙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유난히 붉은 홍시가 가끔씩 풀숲에 떨어져 줍기 기다리는 것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은 그다지 많이 생기질 않아 한  두 개는 입에 넣어 우물거리고 양손에 들고 올 정도의 개수지만 조금 있으면 아마도 바구니를 들고 가야 될 터이지요.

그렇게 떨어지는 홍시만으로 저는 감식초를 담았습니다. 땅에 떨어져 줍지 않아도 곯아 버리지 않을 정도가 되는 홍시로 담아야 식초가 탈이 붙지 않고 시며 색이 좋습니다. 단지에 담긴 채 겨울이 지나고 봄여름도 다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 무렵, 그러니까 일 년 가까이 담가 두었다 거르면 해마다 열병정도 얻을 수 있는데, 저흰 다 먹을 수 없는 양이라 간혹 마을의 어업 하는 분들에게 나눠드리기도 하고 감식초비누를 만드는 분에게 드리고 비누를 몇 개 얻어 쓰기도 합니다. 저는 술과 회를 좋아해서인지 감식초를 주고 생선을 얻으면 참 기분이 좋고 입안에 침이 막 고입니다. 더구나 올해엔 그 맛있다는 보리고추장을 담갔는데 그걸로 초고추장을 타서 요즈음 제철인 병치 몇 점 찍을 생각을 하면 아유- 그냥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녹작지근해 지는군요. 이래서 가을은 일이 바쁘고 고달파도 몸과 마음에 살이 붙는가봅니다.

그러나 가을은 정녕 사색의 계절입니다. 하현의 달이 깊은 밤, 창호를 넘어들어 불을 꺼도 방이 밝아지면 초저녁에 든 잠이 저절로 깨어져서 옷을 걸치고 문 밖에 나섭니다. 신발을 꿰고 토방을 내려서면 졸고 있는 달님보다는 가을의 별자리들이 모두 다 새벽 동편하늘의 샛별처럼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여름밤의 하늘이 은가루를 뿌린 듯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수천수만의 물결이라면 이즈음의 그것은 눈을 옮기면 다 세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적은 수의, 외로워서 더 반짝이는, 잠 못 드는 사람들 같습니다.

마당을 지나 밭둑으로 발을 옮기면 이슬에 맺혔던 별빛들이 부서져 구르고 길을 내주듯 잠시 풀벌레들이 울음을 멈추지요. 그러다가 이내 다시 천지사방이 그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면 문득 길을 잃고 섬에 갇힌 듯 막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고개 들어 다시 하늘을 보면 북쪽 하늘에 언제나 변함없이 북극성이라는 길이 있습니다. 다른 별에 비해 뚜렷하게 밝지 않아도 늘 버릇처럼 눈으로 먼저 쫓아가는 마음의 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며칠 전엔 나락을 베었습니다. 콤바인 돌리기 쉽게 논의 네 귀퉁이를 낫으로 조금씩 베어 놓고 콤바인 가진 사람에게 전화를 했더니 마침 제 논 옆에 논을 베러 온다고 해서 바로 이어 제 논까지 베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벼를 베는 데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심을 때와는 달리 줄을 맞출 필요도, 모나 논의 상태를 고려할 필요도 없이 거침이 없습니다. 논이 지나치게 마르지도 않아 콤바인이 덜컹거릴 일도 없고, 침식평야 논이 아니어서 빠질 일도 없고, 벼가 이슬에 젖어 있지도 않으니 기계가 막 달려간다고 할까요. 어찌 보면 너무 순식간이라 텅 비어버린 논에 콤바인까지 나와 버리니 허무하기조차 합니다.


베어진 나락은 1톤짜리 커다란 자루에 쏟아 부어서 차에 싣고 바로 옆에 있는 건조실로 옮겨 지게차로 내려놓으면 끝입니다. 유기농 벼만 건조하는 곳이라 제 것도 바로 건조할 수 있다 했으니 나중에 방아 찧을 때 실어내가면 됩니다. 지금은 이처럼 나락을 벤다고 해도 사람이 할 일이 없습니다.

기껏 낫 들고 네 귀퉁이나 돌려 베고, 나락 쏟아 부을 때 자루나 잡아주면 그만입니다. 땀 한 방울 나지 않고 먼지나 흙 한 톨 손에 묻히지 않으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이러니 트랙터와 콤바인, 이앙기를 갖춘 사람은 남의 논을 백마지기, 이백마지기씩 빌려서 농사를 짓는가봅니다. 그런 사람들이 논에서 일할 때 느끼는 감흥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논농사는 심을 때부터 이미 계산이 나와 있는 것이라 논이 많을수록 돈의 액수도 늘어나겠지요.

밭의 콩은 아내와 함께 이틀을 거두었습니다. 잎이 완전히 떨어지기를 기다리다간 콩 꼬투리가 많이 튈 것 같아 조금 덜 익은 게 있어도 다 거두었습니다. 꼬투리가 아직 퍼런 것들은 익기는 글러버린 셈이어서 가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콩 종자를 한 번 바꿔봤더니 이 콩은 예전 것에 비해 꼬투리가 연한지 잘 뜁니다. 새하얗이 동글동글한 것들이 땅에 톡톡 굴러다니듯 눈을 말똥거리고 있으니 한 두 개씩이라도 줍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 손 가득 주어보니 이 콩은 유달리 하얘서 콩 속에서 옥양목의 그 푸른빛이 나는 듯 했습니다. 솥에 떨어 붓고 뜨거운 불에 삶기가 어쩐지 쉽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잘 말려서 두드리게 되면 먼저 청국장부터 만들어 먹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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