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벼 베는 일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 내린 좋은 비 때문에 밭일이 바빠졌습니다. 올해는 겨울이 빨리 온다는 소리가 있어서인지 양파 심는 일을 부쩍 서두르는듯한데, 다른 해 같으면 시월 말부터 십일월 초까지 심던 것을 한 열흘 빠르지 않나싶군요. 저도 저번에 갈아놓은 밭에 거름을 뿌리고 조카에게 로타리를 부탁했습니다. 한번 갈아뒀던 밭이라 저번 비에 땅이 아주 흠뻑 젖어서 일주일이 훨씬 더 지난 지금에서야 고슬고슬 일할 만합니다.
때마침 공동체 기숙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이 외출이 허락되는 주말이라 집에 와서 함께 일해 참 수월하게도 거름뿌리는 일을 마쳤습니다. 아들 녀석은 요즈음 부쩍 키가 커서 이제 저와 얼추 비슷합니다.

호리호리하기만 하던 몸도 불어난듯해서 옆에 있으면 왠지 든든하고 마음이 기꺼워집니다. 중2때보다는 철도 좀 난 듯하고요. 거름뿌릴 일이 힘에 버거워서 걱정스러웠는데 도와 달랬더니 군소리 없이 따라나섰습니다. 갈아놓은 밭이라 외발수레에 거름을 담아서 밀고 다니기가 여간 힘이 들 텐데 한참 힘꼴이 생기는지 설렁설렁 해치워버립니다. 거름을 고루고루 뿌리는 일은 이제 내 몫인데 저는 욕심이 생겨서 포대를 뜯어서 삼태기에 쏟아부어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그러니 일이 저 혼자 할 때의 삼분의 일밖에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일도 이렇게 다 수월하면 농사 지어 먹을 만하겠지요. 그러나 일년 중에 이런 오진 경우가 며칠이나 될는지요. 자식도 품안에 적 자식이라고 이제 조금 더 크면 다 제 갈 길로 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틈이 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농사짓기를 바라는 제 마음을 드러냅니다만 그것이 어디 제 맘대로 되겠습니까? 다만 데리고 있을 때 땅에서 일하는 지극한 자세를 보여주어서 나중에 어디서 무엇을 하던 농사짓는 마음으로만 하면 다행일 것입니다.

양파는 세 깡통을 모두 부었는데 고자리가 갉아댄 게 많아서 시방 모판에 남아 있는 것은 한 깡통 분량이나 되는 듯합니다. 그러면 약 100여평 정도 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유기농가들 중 양파농사를 하는 친구들에게 여기저기 모종부탁을 해두긴 했는데 일하는데 자신이 없어서 아무래도 그냥 제 것만 심고 말아야겠습니다. 이렇듯 점차 점차 농사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욕심내어서 해도 모아놓고 사는 게 어려운듯한데 이러면 농사로는 무얼 기대할 수 없겠지요. 아니 그 기대라는 것을 진즉 버렸기에 욕심내지 않았다고 해야 맞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땅에서만 농사랍시고 지으면서 한눈을 팔지 못하고 꼭 40년을 넘겼습니다. 우리가 100년을 산다고 해도 반환점을 넘기고 7년이나 더 지난 나쎄인데, 나이 50이 넘어지자 이대로 농사만 지으며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인생 2모작이니 뭐니 들 말하는데, 나도 뭔가 새 노트를 한권 꺼내서 인생을 다른 것으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 그러할 뿐 딱히 무엇을 새로 시작할 것인가를 모르겠고, 설사 그런 일을 찾았다손 자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찌어찌 돌고 돌아 다시 농사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답니다. 그것도 프랑스사람 알랭 드 보통이 엮고 쓴 인생학교, 돈, 일, 시간, 세상, 정신, 섹스라는 책을 읽고 나서요.

하지만 이제는 농사에만 매달리지 않겠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겠다 싶으면 그것 먼저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니 비로소 농사와 다른 일의 경계가 무너져 버리더군요. 쪼그만 것이라도 새로운 일에 자꾸 몸 바치게 되고 농사짓는 마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아니 참 많이 자유스러워졌습니다. 사람이나 일을 대하는 방식이 농사꾼이되 농사라는 잣대로만 재지 않는 생각의 틀을 하나 더 얻게 되었습니다. 아까 아들 녀석이 좀 철이 난 것 같다고 했는데 그와는 또 다른 면에서 제가 조금 더 철이 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단풍이 절정을 향해 온 산을 물들이고 가을날이 맑고 좋아서 요즈음은 주말과 휴일이면 구경나온 사람들의 차로 도로가 몹시 소란스럽습니다. 들리느니 사방에서 연다는 축제 소식이요, 보이느니 울긋불긋 이어서 저도 마음이 달뜨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가서보면 지나치게 상업적인 면만 많아서 적이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농사꾼들의 축제를 생각합니다. 언제요? 농사꾼들은 사실 꽃피고 새 우는 봄과 단풍드는 가을에 하필 일이 바쁘고 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놀기 좋아서 남들 다 놀 때 놀 수 없는 것이 농사꾼의 팔자이지요. 그래서 정작 쉬며 놀며 해야 할 때는 겨울이거나 어중간한 계절인데 어차피 농사꾼 소명이 이런 것이라면 아예 역발상적으로 일주일에 한번 축제를 벌여 보는 게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무엇으로, 어떻게요?

자기 지역에서, 즉 면소재지쯤에서 자기가 생산한 농산물이나 임산물 축산물 따위, 가공품 공예품 따위, 쓰지 않고 집안에 처박아 두는 옷, 신발, 가구 따위들을 들고 나와서 팔고 바꾸고 나누고, 한편으로는 포장마차도 하나 만들어 운영하고 공연, 전시 같은 것도 해 보는 것으로요. 시장이되 그것이 광장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농사꾼의, 농사꾼에 의한, 농사꾼을 위한 축제가 되겠지요.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