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 만에 양파를 다시 심었습니다. 경운기로 갈아놓은 밭에 아들 녀석과 함께 거름을 뿌리고, 트랙터 가진 조카를 불러 로타리를 한 다음, 아내와 양파용 검정비닐을 씌우려니 마음이 조금 설레는 듯도 했습니다. 300평정도 심을 모를 부었지만 고자리가 많이 갉아댄 탓에 100평정도 심을 양만 되는듯해서 비닐 씌우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줄을 반듯하게 맞춰서 길게 다섯줄을 씌우고는 끝이었으니까요. 저는 그 위에 다시 흙을 더 누르고 끼얹어 마무리하고 안식구는 양파모종을 뽑았습니다. 하루 전에 살짝 비가 온 덕분에 모종이 수월하게 뽑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후 내내 양파 심을 준비만으로 꼬박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 이튿날도 하루 온전하게 아내와 둘이서 양파 심는 일을 했습니다. 다른 해 같으면 대여섯명의 놉을 얻어서 했지만 식구끼리만 심으니 아침 일찍 서두를 일도 없고 따로 새참을 준비할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주 홀가분합니다. 한사람이 됐던 다섯 사람이 됐던 일꾼을 부르면 그 뒤치다꺼리 때문에 식구 한명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 한두명 놉을 둘 바에는 그냥 식구끼리 일하는 게 낫습니다만, 이건 아예 저와 아내 둘만 심어도 하루면 끝날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침 먹고 커피 한잔 마시면서 이것저것 해찰도 하다가 느긋하게 호미 들고 밭으로 나갑니다.

양파는 한 두둑을 둘이 마주앉아 심습니다. 비닐을 씌운 한 두둑의 가로줄이 열두 구멍인데 그것은 양쪽에 마주앉아 손을 뻗어야 심을 수 있는 길이여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한쪽에 앉아 여섯 구멍씩 나눠서 심어나가는 것이어서 이제 손이 날랜 아내가 저보다는 먼저 앞서 심어 나갑니다. 손 빠르기로야 저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지만 갑자기 의존심이 생겼는지 아내를 이겨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잘하는 사람은 이겨먹지 말고 잘하게 내버려둬야 더 잘해서 제 몫이 줄어드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일은 이제는 점점 더 힘이 들어 하지 못할 정도로 저는 관절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 쉬엄쉬엄 일을 하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거르지 않고 오는 분이라 이날도 예고 없이 와서는 저희가 밭에서 일하고 있으니 손수 부엌에 들어가 커피를 타가지고 밭으로 옵니다. 그만큼 허물이 없는 사람입니다. 잠시 밭둑의 감나무 밑으로 나 앉아서 흙 묻은 손으로 커피 잔을 받아들고 감 몇 개를 따서 깎으며 서로 안부를 묻습니다. 일할 때 손님이 오면 이래서 좋습니다. 일 핑계 대고 굳이 따로 손님 응대 하느라 시간 내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리고 흙 묻은 손으로 악수하면 그거 참 기분이 좋습니다. 그게 가장 저다워서 그 어떤 것도 꾸미거나 보탤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비록 잠깐이지만 흙속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격의가 없고 위선과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섯 두둑의 비닐 중에 겨우 네 두둑을 심고 나니 모종이 바닥났습니다. 그것도 모판에 남아 있는, 자잘해서 겨울에 얼어 죽지 않을까 싶은 모종까지 뽑아다 심고서야 네 두둑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도 어쩌면 다행입니다. 해마다 저희 집 유기농 양파 즙을 찾는 분들에게 삼년이나 보내드리지 못했는데 이번에 이만큼이라도 심었으니 내년에는 조금씩이라도 보내드릴 수 있을 터지요. 물론 제가 양파농사를 하지 못하는 사이 다른 유기농 양파 즙을 구하셨겠지만 개중에는 다른데서 구하지 않고 저에게 전화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함을 덜 수 있겠습니다.

양파를 심고 난 이튿날은 보리 심느라 꼬박 하루를 보냈습니다. 예초기 둘러매고 밭둑 몇 군데를 깎아낸 다음 깨와 콩, 녹두 거둬낸 자리를 경운기로 갈아엎었습니다. 땅에 물기가 적당해서 갈기는 어렵지 않지만 아침부터 시작한 경운기질을 오후 세시까지 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이날은 밭만 갈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얼핏 들으니 바로 내일 모래 세에 비가 온다고 하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동편하늘에 아주 강한 붉새가 나타나서 조만간 비가 오리라 생각이 드니 밭만 갈고 말기에는 마음이 조급했습니다.

보리는 입동 전에만 땅에 묻어 달랜다지요? 상강 지난 지금 입동은 새달 7일이니 보리 심기는 지금이 적기이며 더욱이 심고 비를 맞을 수 있으면 더 바랄나위 없겠지요. 해서 서둘렀습니다. 어제 양파 심는답시고 딴엔 힘이 들어서 오늘은 슬슬 경운기질로 하루 보내려고 맘먹었는데, 종자 뿌리고 로타리까지 마쳐버려야 되겠다 싶으니 하루 종일 할 경운기질을 세시에 끝내느라 참 힘이 들었습니다.

바로 숨 돌릴 새 없이 40kg정도의 보리종자를 뿌리고(이게 가장 정신 쏟아야 할 일입니다) 경운기에서 쟁기를 떼어내고 로타리를 붙이려 아내를 부르니 쉬엄쉬엄 내일 한다더니 왜 그리 서두느냐고 의아해 하는군요. 비하고는 상관없이 한번 시작한일은 낮이 됐던 밤이 됐던 죽을 똥 살 똥 매달려서 끝내 버려야 편안해 하는 게 제 성질임을 모르지 않는 아내이지만 제가 요즈음 몸 상태가 좋지 않음도 알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덕분에 씨 뿌리고 끌어 덮는 일까지 쇠스랑 대신 경운기 로타리로 해버리고 나니 비오기 전에 꼭 할 일을 해냈다는, 그리고 하루의 시간을 더 벌었다는 개운한 안도감이 찌뿌둥한 몸도 날려버려선지 저녁엔 참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내년 봄의 푸른 보리밭을 꿈꾸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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