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농촌에 희망을 지피는 ‘한류 농업’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고가 점차 현실화하는 가운데 기상이변과 재해는 이미 일상적인 것으로 치부될 정도다. 가뭄과 홍수, 냉해 등 자연재해가 해마다 반복되고 피해규모가 점차 확대되는 것도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이 원인이다. 기후변화와 기상이변은 무엇보다 인류 생존을 책임지는 농업에 무시무시한 타격을 가한다. 1%의 과잉·과소로 인해 농산물 가격이 요동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기후변화와 기상이변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 문제는 그 후폭풍이 상당하다.

기상청은 이런 상태로 한반도가 뜨거워진다면 21세기말 태백산과 소백산 인근을 제외한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이 아열대기후로 변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농촌진흥청은 기후변화에 대비한 품종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미 필리핀, 베트남 등 아열대 기후 국가에 진출해 미래형 쌀 품종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쌀 재래품종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현지 농민들에게 농진청이 개발한 품종을 보급해 현지 농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 필리핀 농업희망 이끄는 ‘KOPIA’

▲ 코피아센터 관계자들이 일로일로 쌀 재배단지에서 생육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한때 쌀 수출국가로 막강한 농업강국으로 군림하던 필리핀은 지도층의 판단 실수로 졸지에 쌀 수입국으로 전락했다. 기후변화 등으로 쌀 가격이 요동을 치면서 쌀을 수입해야 하는 필리핀 입장에서는 불안감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아열대 기후에서 쌀품종을 개발해야 하는 한국과 선진농업기술 도입이 절실했던 필리핀의 사정이 맞아 떨어지면서 지난 2010년 KOPIA 센터가 설치·운영됐다.
농진청은 아열대기후에 적합하면서 우리 밥맛과 같은 품질과 수량을 유지할 수 있는 품종 개발에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아울러 필리핀 전역을 6곳으로 나눠 지역별로 맞춤형 품종 선발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필리핀 농민들은 쌀 품종이 전혀 개량되지 않는 재래품종을 재배할 수밖에 없는 여건으로 ha당 수확량이 3톤 내외에 불과했다.
농진청은 지난해부터 일로일로 지역에 적합한 품종을 선발·공급했다. 길쭉한 모양의 찰기가 적은 인디카 계열 벼 품종으로, 105일 만에 수확이 가능하다.

지역 맞춤형 쌀품종 공급은 놀라운 성과를 냈다. ha당 수확량이 최고 5톤까지 향상된 것이다. 재래품종과 개량품종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농민들은 농진청의 높은 농업기술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6일 일로일로 쌀 재배농민들은 프로세소 알카라 필리핀 농업부 차관과 재배농민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한 ‘농민의 날’ 행사에서 농진청 관계자, 코피아 관계자를 초청해 무한신뢰를 표했다. 

■ 자포니카 쌀도 뜬다

▲ 보홀 농민들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자포니카 쌀 시험포장
지난 8일 개최된 ‘보홀 농민의날’에는 보홀 주지사 등 재배농민 400여명이 참석했다. 보홀 쌀 재배농민들은 한국 쌀품종인 MS11(아세미) 재배로 전환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날 농민의 날 행사에서는 농진청이 개발한 대표적인 아열대 품종 MS11가 소개돼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이 품종은 열대지역인 동남아지역에 재배될 수 있는 자포니카 계열의 벼 품종이다.
농진청은 한반도 기후변화에 대비해 열대지역에서 재배될 수 있는 쌀품종 개발에 뛰어들어 ‘아세미’를 탄생시켰다.

 이를 위해 농진청은 우리나라 벼 100여개 품종과 육성과정에 있는 우수한 벼 종자를 매년 필리핀에 보내 ‘진미’를 찾아냈다. 그 이후 ‘진미’에 밥맛이 좋고 병해에 강한 ‘철원46호’를 교배해 ‘아세미(수원574호)’를 탄생시킨 것. 농진청은 이 품종을 보홀 지역 일부 농가에 보급한 결과 폭발적인 반응을 불렀다.
‘아세미’ 품종은 수확량이 헥타르 당 4~5톤으로 현지 품종인 ‘IR72’ 보다 10% 많고, 모내기부터 수확기까지의 기간이 약 86일로 현지 재배품종보다 7~10일이 짧아 1년에 2~3회 재배할 수 있다.
농진청은 필리핀 정부와 손잡고 18만불을 투입해 내년부터 2017년 12월까지 이 품종을 필리핀벼연구소(1개 마을 5농가), 보홀지역(2개마을, 20개 농가), 일로일로 지역(1개 마을, 10개 농가) 등에 확대 보급할 계획이다.

■ 다양한 쌀품종 개발 박차

농진청은 열대지역에서 명품쌀로 도약할 수 있는 ‘아세미’ 품종 개발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한 기후변화에 적합한 쌀품종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필리핀 쌀산업이 자급률 100%를 달성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기술지도에 나설 방침이다. 필리핀은 농기계 보급률이 현저히 낮은데다 재배기술이 확립되지 않는 탓에 쌀 수확량이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코피아의 교육을 받고 지역실정에 맞는 쌀품종으로 전환한 농민들의 수확량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농민들의 뜨거운 교육 열기는 일로일로 농민의날, 보홀 농민의날 행사에 참석한 농민들이 단 한명의 이탈자 없이 코피아 관계자가 교육을 마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아울러 농민들의 코피아가 자주 농민교육을 개최해 농민들의 소득향상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할 정도다. 
농진청 관계자는 “기후변화에 적합한 품종 개발을 위해 시작된 연구사업이 이제는 한국의 높은 농업기술력을 세계에 선보이는 기회의 장이 됐다”면서 “후진국들에 대한 선진농업기술 전수는 지속하되 열대, 아열대 기후에 적합한 한국형 쌀품종 개발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인터뷰  이정택 농촌진흥청 KOPIA 필리핀센터소장


필리핀 쌀산업 재도약, KOPIA가 중심


“필리핀은 쌀산업을 포기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고 있습니다. 한번 무너진 쌀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지만 녹록치 않은 실정입니다. KOPIA는 필리핀의 쌀산업 재도약을 위해 최신 농업기술을 보급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정택 농촌진흥청 해외농업기술개발(KOPIA) 필리핀센터소장은 “필리핀은 농경지 면적이 우리보다 6배가량 넓으면서도 쌀 단위생산량은 우리보다 50% 가량 적다“면서 ”지역 실정에 맞는 쌀품종 개발, 농기계 도입, 재배기술 등 쌀산업에 필수적인 요소들이 확립돼 있지 않아 쌀산업이 기지개를 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필리핀은 지난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쌀을 수출하는 농업강국이었지만 1980년대 들어서 쌀수입이 훨씬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쌀산업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쌀산업을 포기한 대가는 혹독했다. 농업기반시설이 급속도로 붕괴되고 무엇보다 농민들의 자포자기 심정은 뼈아플 정도였다.
이 소장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재래품종, 비료·퇴비 등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농사를 지었지만 기대만큼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서 ”무엇보다 농수로 등 관개시설이 무너진 현실에서 농사를 지어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농진청은 필리핀의 쌀산업의 재도약을 위해 선진 농업기술의 아낌없는 전수에 나섰다. 필리핀 쌀산업 재도약의 중심은 ‘한국형 새마을운동’이다. 이는 필리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우선 코피아는 지역별로 맞춤형 품종 개발에 나서 맞춤형 품종을 희망하는 농가에 40kg씩 무상으로 보급했다. 이 농가들은 수확을 하고 무상으로 지원받은 40kg을 마을에 내놓는다. 이렇게 해서 모인 쌀은 농기계 구입, 퇴비 구입 등 마을 자치예산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소장은 “지역별 맞춤형 품종보급, 올바른 퇴비·비료 사용법, 농기계 활용 방법 등 다양한 기술이 전수되면서 농민들의 쌀 생산량이 30% 가량 늘었다”면서 “무엇보다 필리핀 농업이 경쟁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교육이 중요한 만큼 코피아는 지속적인 농민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 정부도 농진청에 농업 기술인력 양성을 요청하고, 농민들의 교육 열기도 매우 뜨거운 만큼 필리핀 쌀자급 100% 시대가 곧 열릴 것으로 이 소장은 기대하고 있다.
지난 7월 부임한 이 소장은 현지에 적응할 여유도 없이 연일 필리핀 현지 쌀 시험포장, 재배농민들을 만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 소장은 “지역별 맞춤형 쌀 재배 매뉴얼을 영문판과 현지 언어인 따갈로어판으로 만들어 보급할 계획”이라며 “농민들의 교육을 통해 농민들이 선진농업기술을 습득할 때 필리핀 농업은 충분히 경쟁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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