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해보다도 단풍이 더 곱게 물드는 것 같습니다. 올해도 산이나 들에 크게 생채기를 낸 태풍이 없었고 날씨가 좋아서인지 전체적으로 색깔이 짙어지며 형형색색입니다. 먼 산꼭대기쯤에서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단풍을 보며 ‘저게 언제 예까지 오누?’ 생각했는데 일주일 남짓 사이, 어느새 집 뒤까지 다가왔습니다. 아침저녁 일교차가 많이 벌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한낮은 참 맑고 화창해서 일하기는 좋고 가만히 단풍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일이야 요즈음 뭐 크게 바쁘고 힘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남은 일의 마무리가 겨울의 준비인 셈이어서 발걸음이 느려지기 일쑤입니다. 뒤안 화장실을 가다가도 담 옆에 핀 국화 앞에 한참씩 서있게 되고 벌써 땅에 떨어진 낙엽을 몇 장 주어보게도 됩니다.

세월 참 빠릅니다. 여름인가 싶더니 벌써 가을이고 단풍드는가 싶더니 곧 낙엽이 집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게끔 한 잎 한 잎 떨어져서인지 갑자기 숲이 성글어 보이기도 합니다. 잎이 봄여름과는 달리 새로 돋을 리 없고, 있는 것은 없어지기 마련이니 성글어질게 뻔 한 것이지만 그 성글어진 것을 보며 마음이 허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여백인 것이어서 그 자리에는 여름의 치열한 뜨거움과는 다른 서늘한 관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을의 이런 정서가 좋습니다. 가을엔 어떤 질서가 보입니다. 마무리 하면서 다가올 엄혹함을 준비해야 하는 이 시차의 압박은, 그러나 그렇게 압박스럽지만은 않아서 서서한 변화를 느끼기에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침의 여명의 환해짐 보다는 저녁의 땅거미가 더 신비하다 생각합니다. 아침의 밝음은 어찌 보면 한꺼번에 어둠을 몰아내버리고 세상을 광명스럽게 하는데, 저녁 해의 사윔은 모든 사물에 어둠의 그림자를 더해 가면서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불러옵니다. 숲속에 있는 저희 집 화장실에 앉아서 보는 저녁은 적막 속에 나도 하나의 사물이 되는듯해서 가을엔 자주 오래토록 거기에 앉아 있곤 합니다. 그러면 어두워지던 것들이 반대로 제각각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한낮이나 여름과는 달리 더 뚜렷이 각각의 자기 존재들이 상대방에게 인식되고 새겨지는, 그래서 어둡되 결코 어둡지 않은 게 가을의 초저녁입니다. 그것은 단풍의 색이 밝아서 만일까요? 별빛이 차고 높아서 만일까요?

저번 양파와 보리를 심고 나서 이틀 후에 비가 사흘이나 왔습니다. 가을비는 구럭 쓰고도 견뎌낼 수 있다 했지만 그렇게 적은 비는 아니었습니다. 한 30mm 가까이 왔으니까요. 들일이 거의 다 끝나가기에 망정이지 아직도 더러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이 비로해서 가을일 마무리가 일주일은 늦어질 겁니다. 바람이 불어서 그새 나뭇잎들이 더 떨어지고 이제 일교차라하기에는 달리 전반적으로 기온이 내려갑니다. 9월 하순 무렵부터 방에 불을 넣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사흘에 한번 조금씩이던 것이 이틀에 한번이다가 11월도 초순을 넘긴 지금은 날마다 한 번씩 아궁이에 불을 지핍니다. 날이 추워질수록 굴뚝을 타고 오르는 연기는 더 희게 보입니다. 추울 때 우리 입김이 희게 뿜어져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불이란 것, 참 이상합니다. 불 때는 연기만 눈으로 보고 냇내만 코로 맡아도 마음이 더없이 따뜻해지니까요. 그리고 안정됩니다. 하물며 불앞에 앉아서 활활 타는 것을 보는 것이야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가을은 불이 있어 더 좋습니다. 청국장 끓는 냄새와 남새밭에서 뽑아다 담근 채김치가 있어서 좋습니다.

노오란 볏짚이 쌓여있고 그 위에 감나무 잎과 홍시가 떨어져있어 좋고 아침엔 유난스레 까치가 깍깍대는 게 좋습니다. 제깟 놈이야 나뭇가지에 앉아 있으려니 손발시리고 까치밥마저 없어질 날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걱정이겠지만요.

그새 감을 땄습니다. 날이 추워질수록 감이 물러져서인데, 팔지 않을 바에야 단감은 무르는 게 많이 생길쯤에 따야 달기가 더 달답니다.  저희 집에는 밭둑에 커다란 단감나무가 나란히 두 그루 있습니다. 그래서 밭에서 일하다 말고 쉴 때에는 넓적한 돌을 놓아둔 이 나무 밑에 와서 앉아있게 되는데 그늘이 짙고 바람이 잘 통해서 제게 사랑을 받습니다. 심어진지가 40년이 넘지만 물 빠짐 좋은 밭둑이고 거름기가 늘 보충되어서 그런지 해갈이도 잘하지 않고 언제나 그만큼씩 감이 열립니다.

해마다 이 감을 따서 신세진 분들에게 가을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틀 동안 감을 따서 섭섭하다 생각되는 곳은 모두 한 박스씩 보내고 나니 또 한 번 숙제를 마쳤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감 다 따낸 나무 밑을 지나치다가 저는 손으로 감나무를 어루만지며 처음으로 소리 내어 고맙다고 말해주었습니다. 홍시 몇 개와 이파리 뒤에 숨어있는 감 몇 개만을 남기고는 아낌없이 다 주어버린 이 감나무가 가장 가을의 나무답습니다.

이제 아마 까치들에게 남은 감들을 내어주느라고 제 몸을 흔들어 수북이 이파리들을 땅에 떨굴 것입니다. 홍시도 이파리도 다 떨쳐내 버릴 감나무의 저 벗은 몸에서 진정 가을의 가을다움을 봅니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