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에서 안빈낙도를 꿈꾸며…


해남 녹우당(綠雨堂)과 고산 윤선도

녹우당은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연동리)에 위치한 마을의 해남 윤씨 종가를 일컫는데, 전라남도에 조선시대 민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 되었다. 집 전체 규모는 60여칸으로 ㅁ자형을 이루어 안뜰을 둘러싼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채가 여러 동 있는 토지가 많은 양반 계층의 살림살이를 보여 준다. 집 주변으로는 짙은 대밭이 집을 감싸듯이 자라고 있고, 집 뒤편으로는 해남 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과 윤선도의 사당이 있다. 녹우당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가 없으나 고산의 4대 조부인 윤효정(1476〜1543)이 해남에 정착한 15세기 중엽에 세워진 건축물로 추정하고 있다.

녹우당은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으로 주고 생활공간, 가옥을 모두 포함한 14,268㎡가 사적 제167호로 1968년에 지정이 되었다. 녹우당이 있는 마을이름은 연동마을인데 예전에 연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이전에는 ‘하얀 연꽃이 피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백련동(白蓮洞)’이라 불렸다. 녹우당은 우리나라 최고 명당자리 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마을 뒷산인 덕음산 좌우로 그 줄기가 둘러싸고 있고 작은 개울이 마을 앞 들판을 흘러 들어오고, 들판 건너 산이 펼쳐져 있다.

녹우당이라는 이름은 고산 윤선도에서 유래가 되는데, 그는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로 사계절 어촌의 풍경과 어부의 생활을 읊은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고산은 1587년에 한성부(현재 서울) 삼각산 근처에서 태어나 8세 때 큰아버지 윤유기의 양자가 되어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내려가 해남 윤씨의 대를 잇는다. 어린 시절을 이곳에 보내고 양아버지를 따라 안변 등으로 이주해 다녔다. 42세 되던 1628년(인조 6년)에 봉림 대군과 인평 대군의 사부가 되었는데 봉림 대군은 나중의 효종이 되어 즉위한 후 고산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다. 1660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수원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와서 지은 사랑채의 이름이 녹우당이었지만 현재는 종가 전체를 녹우당이라 부른다.

녹우의 원래 뜻은 늦봄과 초여름 사이 잎이 우거진 때 내리는 비이지만, 이곳 에서는 바람이 불면 집 뒤 비자나무 숲의 잎들이 흔들려 부대끼며 내는 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다고 해서 생겼다고 한다. 녹우당 앞의 유물전시관에는 고산이 쓴 “금쇄동집고”, “산중신곡” 등과 “사은첩” 등을 일괄하여 지정된 보물 제 482호, 고려 공민왕때 작성된 이두문으로 쓴 노비문서인  “지정 14년 노비문권” 보물 제 483호, 보물 481호인 윤두서의 작품을 모은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그리고 대표작이자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뛰어난 초상화롤 꼽히는 국보 240호인 윤두서 자화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

 500년을 지켜온 녹우당의 나무들

녹우당의 입구에는 커다란 은헹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멀리서도 은행나무를 보면 녹우당이 어디에 있는 가를 알정도로 크다. 나무높이 20m, 둘레가 5m가 되는 큰 나무로 고산의 4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아들들의 진사시 합격을 기념하여 심었다고 하니 수령이 500년이 넘는다고 볼 수 있다. 모두 4그루를 심었는데 3그루가 아직 살아 있는데 이중 집 앞에 자라는 은행나무는 나이에 비해 건강한 편으로 암나무인데 꼭대기 부분에는 은행잎이 적게 달려 있으나 아래쪽에는 잎이 풍성하게 달려 있지만 열매가 작고 적게 열린다고 한다.

녹우당이라는 이름이 은행나무 잎이 비처럼 쏟아진다고 하여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은행나무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지 녹우당 주변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다. 집앞의 커다란 나무는 집을 알리는 표지인 동시에, 지체 높은 가문을 알리는 상징이기도 하다.  

집안에 있는 회화나무 등 큰 나무는 담 너머로 볼 수가 있고, 담을 따라 집 뒤 쪽으로 가다 보면 커다란 곰솔이 자라고 있다. 곰솔은 보통 해변에 자라는데 상대적으로 바다에서 먼 이 곳에서 자라고 있다. 이 곰솔은 멀리서 보아도 몇백년은 됨직해 보인다. 곰솔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이 나무가 300년이 넘고 가슴높이 직경은 1m, 높이도 24m나 되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바다가 멀지 않은 지역이라 이렇게 곰솔이 오랫동안 자랄 수 있는 것 같다. 집주변으로는 은행나무나 곰솔처럼 나이가 많은 나무들은 적지만 나무들로 둘러 싸여 있고 뒷산에는 비자나무, 소나무, 편백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어 녹우당이 숲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연동마을을 지켜온 덕음산 비자나무숲

연동마을과 녹우당을 감싸고 있는 덕음산은 돌출된 바위나 울퉁불퉁한 기복이 없는 산으로 전체적으로 보면 덕스럽게 생긴 산으로 나무들이 가득 차 있다. 산 증턱에 비자나무숲이 자라고 있는데 이 비자나무숲은 천연림이 아닌 인공림으로 500여년전에 윤씨 종택의 선조가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가 보이면 이 마을이 가난해 진다고 하여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심겨진 비자나무는 이후 지속적으로 종가의 보호를 받았다.

비자나무숲에서는 나오는 비자열매는 종가에서 열매를 모아 마을 사람들에게 구충제로 사용하도록 나누어 주었고, 비자열매 강정을 만들어 종가의 전통음식이 되었다. 이렇게 500년 이상 자리를 지켜온 비자나무 숲은 1972년에 천연기념물 241호로 약 3ha가 지정이 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비자나무 숲으로 가는 길은 300년된 곰솔을 거쳐 녹우당 어초은 묘소를 지나 오른쪽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가다 보면 편백이 숲 가장자리에 나타나는데 이 편백숲도 천연림이 아니라 인공림으로 30-40년 전에 심은 것으로 보이는데 나무 높이는 10-15m정도이고 굵기는 20cm 내외이지만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편백을 지나 숲으로 들어가면 상수리나무 숲을 가득 채우고 있고 그 중간 중간에 붉은 줄기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렇게 소나무와 참나무가 같이 자라고 있어 비자나무가 보이지 않지만 조금 더 들어가 완만한 경사가 끝나갈 즈음 오른쪽으로 비자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는데 주변에는 참나무가 자라고 있어 멀리서도 금방 알 수가 있을 정도이다.

나무가 크지는 않지만 미끈하면서도 굴곡이 진 수피와 진한 초록 잎에 길가 자란 가지의 모습은 전형적인 비자나무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가지가 사람 키 정도 높이부터 달려 있어 이 나무가 어려서부터 경쟁 없이 자랐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조금 더 산으로 올라가면 탐방객들을 위한 나무 테크가 산위로 놓여 있는데 이곳에서부터 비자나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자라고 있는데 숲 전체가 비자나무로 이루어 져 있지는 않지만 경사가 심한 사면에 줄을 이루어 자라고 있다.

비자나무들의 가지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자라고 있는 모습은 마치 가지들이 사열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모양은 경사가 심한 곳에 자라는 나무들이 햇빛을 최대한 받기 위해 가지를 한 방향으로 자랗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비자나무의 높이는 15-20m 정도로 주변의 나무보다 크게 자라고 있고 굵기가 한아름이 넘는디.

5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숲을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여서 아직 까지 이 숲에는 400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 중에 처음 심은 나무가 살아 있다면 나이가 500년이 넘을 터인데 겉으로는 그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렵지만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비자나무들이 가끔씩 나타난다. 비자나무가 나이가 많아서인지 가지가 마르고 잎이 풍성하지 않은 나무들이 종종 보이고, 줄기에 이끼가 자라는 것을 보면 이 숲의 나무들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나이가 들어 잘라낸 죽은 가지와 줄기의 흔적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무겁게 한다. 구불구불한 줄기나 줄기가 2-3갈래로 크게 자란 모양을 보면 이곳의 땅이 비자나무에게 최적이 아닌 것 같다. 산위로 더 올라가면 비자나무가 조금씩 나타나고 나무도 작아지기 시작한다.

산 꼭대기아래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산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다시 비자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곳을 사면이 가파르지 않고 완만하고 계곡이 있어 비자나무의 숫자는 적지만 나무 높이가 크고 더 굵다. 이곳에는 등산로가 없어서인지 사란의 흔적이 없고 낙엽이 수북 쌓여있어 심산유곡에 들어온 듯하다.

등산로가 있는 곳에서는 비자열매를 사람들이 주워가서인지 어린 비자나무를 볼 수가 없었는데 이곳에는 나무 키 10-20cm 정도의 어린 비자나무들이 나타나고 있어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숲바닥에 10cm만의 어린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 이 계곡부에서 비자나무 후계림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 진다.

해남 녹우당 비자나무숲은 해남 윤씨 종가, 고산 윤선도와 함께 500년 이상을 지내온 오래된 숲이다. 특히 비자나무를 심어 숲이 마을 보호하고 사람이 숲을 보호하는 것을 실제로 이루어 냈다는 것만으로도 이 비자나무 숲의 가치는 무궁무진한 것 같다. 비자 열매를 종가에서만 이용하지 않고 마을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 역시 공생의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다른 곳에 보기 힘든 비자나무이기에 197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수령이 수백년이 된 숲을 유지 관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500년 후에도 녹우당과 함께 비자나무숲이 같이 있기를 바라는 동시에 어린 비자나무르이 무럭무럭 자라 더 건강하고 큰 비자나무숲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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