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효의 일생에서 두 번의 큰 ‘모멘텀’이라면 하나가 해골 물 마신 사건이요, 또 하나는 요석공주와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요석공주는 원효의 구도정진에 화룡점정(畵龍點睛)같은 여인이다. 
 
승려를 사랑한 공주, 신라 대천재 ‘설총’을 낳다


◆ 서기 650년 경, 신라는 ‘전시체제’였다.
이웃 백제와의 끝없는 싸움과 북쪽의 강자 고구려도 신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선덕·진덕여왕, 김유신, 김춘추 등 당대의 인재들과 화랑으로 대표되는 신라 특유의 ‘국민총합(國民總合)’ 정신으로 이를 극복하며 강한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원효’와 ‘의상’이라는 두 거목이 신라 민중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데, 그들의 사상은 천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불교의 큰 줄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원효와 의상의 불교는 선명한 특징으로 구별된다.

의상은 당시 신라의 지배층이었던 ‘진골’출신으로 왕실과 귀족, 불교계의 고급지도자 계층을 대변하는 ‘귀족불교’였던 반면 원효는 신분이 낮은 6두품 출신이었고, 세속에 파고들어 설법하고 포교하는 ‘민중불교’였다.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 유학길에 함께 올랐다가 경기도 남양 근처에서 해골에 고인 물을 먹은 원효가 홀연히 깨달은 바 있어 유학을 포기, 의상 혼자 당나라로 향했을 때, 이 두 사람의 상반된 인생행로는 이미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원효는 이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라는 진리를 깨달았고, 이 깨달음이 이후 원효의 파격적 행보를 낳았으며, 그 파격적 행보가 요석공주와의 만남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옥돌공주’의 사랑
요석공주는 김춘추의 딸이다. 요석(瑤石)은 옥돌을 의미하니 ‘옥돌공주’라는 예쁜 이름이다.
김춘추는 진골출신으로는 최초로 신라의 왕위(무열왕)에 올라, 정치적으로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사랑하는 딸의 처지가 늘 가슴 아팠다. 요석은 과부였던 것이다.

김춘추는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끔찍이도 아끼던 딸 ‘고타소’와 사위 품석을 한꺼번에 잃는 불행을 겪었다.
김춘추는 딸에게 따로 궁(요석궁)을 지어 줄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내가 공주의 남편 거진랑을 가장 치열한 전장으로 보내 전사하고 말았으니, 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찢어지는 가슴을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딸만 보면 가여운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최근 한 신하로부터 이상한 보고를 받았다.

“공주께서 원효라는 승려를 사모하고 있는 듯합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냐? 그런데 원효는 6두품 출신이 아닌가?”
신라는 승려의 출신성분까지 따질 정도로 폐쇄적인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김춘추는 요석을 불렀다.

“진골 귀족 중에도 너의 배필이 될 만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중이란 말이냐? 너로 인해 파계라도 한다면 그에게도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 원효의 고뇌
요석은 눈물만 그렁그렁한 채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분황사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무애당에서 설법하는 원효를 보았다. 낭랑한 목소리의 설법은 깊은 내공의 힘을 더해 영혼의 폐부까지 찌르는 위력이 있었다.

공주는 수많은 청중들 속에서 돌로 된 기둥처럼 꼼짝도 않고 넋을 잃은 채 원효를 쳐다보고 있었다. 맑게 빛나는 눈은 원효의 투명한 영혼을 보여주는 듯했고, 반듯한 이마와 덕이 서려있는 뺨은 새벽별처럼 영롱했다.

공주는 하녀를 시켜 원효에게 승복과 모란꽃을 바치기도 하고, 불법공부를 빙자(?)한 개인청강을 신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효는 늘 ‘거기까지만’ 이었다.

요석은 말라죽을 지경이었다. 김춘추도 딸의 이런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원효가 아닌가! 아무리 왕일지라도, 어떤 권력과 부를 가지고도 원효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강제로 뭘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효도 진작부터 요석의 마음을 눈치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분황사에 오지 않는 요석이 궁금했다.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원효는 측근으로부터 요석이 엄청나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석의 몸과 마음이 상상이상으로 망가져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원효는 늘 다니던 거리 설법도 마다한 채 몇 날 며칠을 칩거했다.

“그래, 모든 것은 마음이다. 성(聖)과 속(俗)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원효는 거지 옷처럼 다 떨어진 승복에 허리에 박 하나만 찬 채 서라벌 거리를 다니면서 미친 듯이 노래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줄 건가
하늘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誰許沒柯斧爲斫支天柱)

이 괴상한 노래를 하루 종일 부르고 다녔으므로 웬만한 사람들이 모두 따라 부를 지경이었으나, 아무도 그 뜻을 깨닫지는 못했다.

이 때, 원효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간절히 원하던 또 한사람, 김춘추(태종 무열왕)는 무릎을 탁 쳤다.
“됐다! 스님이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요석으로부터 자식까지 얻고 싶어 한다.” 골품이고 신분이고 딸부터 살려야 했던 김춘추다.

◆사흘의 짧은 운우(雲雨)
원효가 문천교를 지날 때, 원효를 맞이하러 온 관리 한 명이 갑자기 원효를 다리 아래로 밀쳤다. 원효의 옷이 흠뻑 젖자 관리는 “제가 실수로 이런 실례를 범했습니다. 마침 요석궁이 가까우니 거기서 옷을 말리시기 바랍니다”라며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갔다.

무열왕도, 원효도, 요석도 모두 이런 우연(?)이 각본임을 알고 있었다.
궁으로 들어 온 원효를 보자 공주는 가슴이 터질 듯했다.

“.........”
요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정녕 생시란 말인가?
요석공주와 원효는 궁에서 사흘 간 함께 지냈다.

원효는 사흘이 지나자 궁을 나서고 이 후 자기를 소성거사(또는 복성거사)라 칭하며 평생을 민중과 함께하며 설법했다. 소성거사란 ‘아랫것 중의 아랫것’이란 뜻이다.
원효는 “부처의 법은 귀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진심으로 염불을 외운다면 극락에 이를 수 있다”는 설법으로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했다.

요석공주는 열 달 후 아이를 낳는다. 그가 최치원과 쌍 벽을 이루는 신라의 대천재 ‘설총’이다. 이 후 요석공주의 행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는 원효를 만나지도 못했다.
원효는 ‘파계’라는 극한을 통해 궁극적 진리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요석과의 사랑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공주는 원효와 불과 사흘만 함께 했으나, 영겁의 사랑 같은 행복을 맛보았고, ‘설총’이라는 자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사흘’은 우리민족에게도 풍성한 ‘문화적 선물’을 안겨준 축복의 시간이 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원효의 노래는 아주 야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하늘 받칠 기둥’이란 말 그대로 인재(人材)를 뜻한다. ‘훌륭한 자식’을 얻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달라고 한다. 자루 빠진 도끼의 홈은 여성의 생식기를 연상케 한다. 당연히 자루는 남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루 없는 도끼’는 다시 말해 임자 없는 여성을 뜻하고, 과부인 요석을 겨냥한 것이다.
그런데 ‘빌려 달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자유인’ 원효다운 파격이요, 익살이자, 촌철살인의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원효 연금설

김춘추와 김유신은 훌륭하게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효는 “고구려와 백제가 북방의 사나운 적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신라가 유지될 수 있었다”며 삼국전쟁을 중단하고 평화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민중들에게 역설하고 다녔다고 한다.
김춘추는 어쩔 도리가 없어 그를 요석궁에 연금하고 원효의 파계를 조장했다. 원효를 사모하는 요석을 달랠 수 있고, 원효를 파계하도록 해 ‘전쟁중단’ 같은 쓸데없는(?)소리를 못하게 하려는 음모였다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해석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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