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건조시설에서 말린 채 보관해오던 벼를 실어내다가 방아를 찧었습니다. 해마다 저희 쌀을 사주시는 분들에게 보내드리기 위해서 좀 더 서둘렀어야 하는 일인데도 이런저런 다른 일들이 겹쳐서 이제야 방아를 찧은 것입니다. 20kg 단위로 현미는 스물다섯포 쯤 뽑고 백미는 쌀눈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인 8~9분도 정도로 빼는데, 아 글쎄 합해서 올해는 꼭 9kg이 모자라는 100포대 2,000kg이 나왔습니다. 이게 한 필지 1200평에서 나온 쌀인데 작년보다 10포가 더 나온 것 입니다. 유기농으로 지은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많이 나오니 기분이야 좋습니다. 도정료가 24만원이 나왔어도 그것 비싸다는 생각보다는 쌀이 많이 나온 게 더 앞섭니다. 세상에 저만 농사를 이렇게 잘 지은 것처럼요. 그러나 올해는 다 이처럼 쌀들이 많이 나왔다는군요. 이제 이것을 팔아먹는 게 문제입니다. 팔아먹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금방 마음이 아까 좋았던 것만큼이나 착잡해집니다. 제가 올해 주문 받은 쌀은 50포대도 되지 못하니까요. 그러니까 나머지 반은 쌓아두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쌀을 사주겠다는 소비자분들의 필요한 양을 한데 모아서 저에게 알려주는 분의 이야기로는 해마다 각 가정의 쌀 소비량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애들이 다 커서 밖에 나가서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도 예년처럼 집에서 그렇게 밥을 많이 해 먹지 않는다 합니다. 짐작했던 일입니다. 경제형편이 어려워진다고는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나가서 사먹게 되는 일이 많아지는, 우리 식문화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어쨌거나 한나절 택배작업을 해서 쌀을 부치고 나머지는 비닐 포대로 다시 2중 포장을 해서 아랫방에 쌓아 두었습니다. 쌀은 찧은 상태로 그냥 겨울을 나게 되면 봄에 벌레가 생기니까요.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어디에다든 저걸 빨리 팔아치워야 숨통이 트일 텐데 제 깜냥으로는 누구 붙잡고 쌀 사달란 염량이 없습니다. 그러면 체면상 한 두포야 사주겠지만 아는 사이에 그런 부담 지우는 것, 게 중에는 필요한 사람도 있겠고 몰라서 못사는 사람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런 사람을 어떻게 일일이 골라내서 저 50포를 판답니까, 못할 일입니다. 그러니 사람 먹을 것을 쌓아놓고도 이렇게 언짢습니다.

쌀농사 지은 비용은 이제 건조비와 콤바인 삯이 남았습니다. 농사지으면서 들었던 트랙터,  이앙기 삯은 이미 주었으니까요. 거름 값은 연말에 농협에 다른 것 정산할 때 함께 주면 되고요. 옴니암니 따져보니 비용만 약 200만원정도 든 것 같습니다. 쌀은 팔던 못 팔던 이런 것들은 계산해줘야 되는 것들이어서 제 마이너스통장은 마이너스 쪽으로만 내려갑니다.

올해는 또 콩 값도 무지무지 싸더군요. 밥에 두어먹는 서리태콩도, 약콩이라 부르는 쥐눈이콩도 kg당 5천원 밖에 나가지 않습니다. 예년의 반값 수준입니다. 볼일이 있어 시장에 나갔다가 눈에 띄어 물어보니 값이 그렇대서 쥐눈이콩 2kg을 만원 한 장에 사긴 했습니다만, 같이 농사짓는 사람입장에선 그게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실은 저희 집 메주콩도 올해엔 생각보다 월등하게 많이 나왔습니다. 심은 면적도 적은데다 고라니가 뜯고 꿩이 쪼았어도 타작을 하고보니 세포대나 나왔습니다. 나쁜 것 골라내면 약 80kg쯤 될 듯합니다.

신문을 보니 중국에 이어 뉴질랜드와도 FTA가 체결됐다는군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맺은 14번째 협정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축산물시장은 완전 개방됐다고 하는데 어디 축산물뿐이겠습니까. 모든 농산물이 다 시차만 있을 뿐 나중엔 관세가 철폐될 테고 개방됩니다. 또 관세라는 것도 국내시장의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조절이 되겠지요. FTA의 체결을 두고 정부는 우리의 경제영토가 확장되었다고 하더군요. 저같이 무식한 농민이 듣기엔 우리의 농산물이 세계만방에 팔아먹을 수 있는 길도 넓어지고 따라서 그만큼 우리가 잘살게 된다하는 것 같더군요. 맞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하더군요. 벼 포기에는 인삼 달인물이라도 뿌려주어서 수험생의 머리를 좋아지게 하는 기능성 쌀을 만들어야하고, 콩에는 우족 고은 육수라도 쏟아 부어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콩을 만들어내야 한답니다. 맞습니까? 흙물 햇빛 바람에 의지하지 않고 생산해 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이 세상에서 신기한 농산물일 것이어서 팔아먹는 데는 아무문제가 없다는 것 같은데 이런 말과 정책을 만드는 분들은 아마도 시방 쌀 대신 바람 밥 먹고 구름 똥을 싸는 분들이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혹시 제 생각이 틀렸더라도 무식한 농사꾼이어서 그러려니 널리 이해해주십시오.

자고나니 간밤에 서리가 눈처럼 왔습니다. 집 둘레 처마 밑을 빼고는 온통 새하얀데 윤9월 하현의 새벽 조각달이 비수처럼 내리꽂혀 더 반짝입니다. 이른 새벽, 뒤를 보는 버릇이 있어 뒤란으로 돌아가는데 서리를 밟은 고무신이 미끄러져서 넘어질 뻔한 소란 통에 동백나무에 깃들어 자던 새가 푸드득거리며 날아갑니다. 어제도 가래침을 돋우어 뱉는 소리에 놀라 푸드득 날아가서 조심하려니 생각했지만 또 그것의 단잠을 깨운 격이 됐습니다. 오늘 하루는 이것만이 미안한 일이 되었으면 싶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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