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참 순한 것이 내렸습니다. 첫눈입니다. 첫눈치고는 많이 왔군요. 수돗가의 함석 지붕위에 쌓인 것을 보니 한 뼘 가량이나 됩니다. TV가 전하는 말로는 이곳 지방의 적설량이 26.7cm라 합니다. 내린 눈도 물기가 많은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렇게 날씨가 푸근한 탓이겠지요. 이 많은 눈을 추운 바람이 몰고 왔다면 얼마나 을씨년스러웠을까요. 마루며 토방이며 쓸어도 쓸어도 금세 눈보라로 온 집안이 새하얗게 얼어버렸을 겁니다.

한길에서 저의 집으로 들어오는 길가의 소나무 가지마다 소복소복 눈이 쌓이고 북덕새 잔풀 더미위에도 찔레덩굴 위에도 마치 지붕을 새로 해 덮은 듯 둥그렇게 집이 만들어졌습니다. 저속에 아마도 꿩 네 식구나 토끼 족제비 녀석들이 쥐눈이콩처럼 까아만 눈을 서리태 콩처럼이나 커다랗게 키워서 하룻밤 새 변한 세상을 놀랍다는 듯 바라보며 순하게 껌벅이고 있을 겁니다. 조금은 걱정스러워 하면서 말이지요. 저도 조금 걱정이 됩니다. 아직 김장을 하지 않았거든요. 김치냉장고가 있어 일찍 김장을 하는 모양이지만 저와 제 아내의 DNA에는 그것이 새겨지지 않았는지 해마다 12월 중순 무렵이나 돼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답니다.

날씨 때문이겠지요. 이곳은 그래도 반도의 남쪽인 셈이라 12월이 돼도 이렇다 할 추위나 눈이 잦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올해는 추위대신 눈이 많다고 하던데 과연 조금 빠르다싶게 이렇게 눈이 왔습니다. 이제 이 눈이 주말까지 일주일가량이나 이어진다고 하니 그동안 추위와 바람이 몰아치기도 할 것이어서 뽑지 않고 텃밭에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저 김장채소들이 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배추는 얼어도 조금 풀리면 괜찮은데 무는 얼면 속에 바람이 듭니다. 이파리는 질겨지고요.

이러긴 해도 눈은 사람 마음을 참 넉넉하고 푸근하게 해서 눈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걱정도 잠깐, 편안해집니다. 그래서인지 아주 오랜만에 마을에 내려가 보고 싶었습니다. 불과 10여년사이 유명한 관광지로 변해버려서 옛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이렇게 눈이 오면 몇 사람 정도는 동네 끄트머리의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어두컴컴한 막걸리 집에 모여서 무료한 눈들을 껌벅거리고 있을 겁니다. 고스톱이나 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렇습니다. 그놈의 고스톱! 겨울이면 아니 틈만 나면 그것만이 시골의 유일무이한 오락이어서 늙으나 젊으나 한자리에 붙어 앉아 코를 박고 있는 것인데, 그래서 저같이 화투 못하는 사람은 늘 그 주변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오기 마련인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또 옛날 얘기입니다만 저의 동네는 조그마한 어촌이어서 거의 반 정도의 사람들이 어업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봄철의 주꾸미잡이 때부터 김장을 하는 이 무렵까지가 바닷일을 하는 기간인데 지금은 물매기나 뱅어 보리새우 굼벵이 새우 따위가 잡힙니다. 이것들은 모두 겨울철에만 잡히는 찬물고기라 해서 새우는 갈아서 김장을 하는데 쓰고 물매기나 뱅어는 술국으로 회로 먹기에 좋은 것들입니다. 손 호호 불어가며 그물에서 건져 올린 이것들을 잘 손질해서 입맛에 맞게 요리해놓고 술판을 만들면 한나절은 그것만으로 떠들썩하니 흥에 겨웠습니다. 특별난 근심이나 걱정도 없었습니다. 젊었기 때문에 그랬겠지요.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단순했고요. 겨울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들만큼이나 사람들은 펄떡였고 바라보는 세상은 비리게 싱싱했습니다. 그 비린내음의 한 끄트머리나마 어디에 숨어있을까 싶어서 마을에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역시나였습니다. 어제 오늘 갑자기 이리 된 것이 아님을 익히 알지만 그 옛날의 물매기니 뱅어니 새우니 하는 비린 것들은 어디에도 없고 펄떡이는 사람들 또한 더 이상 순한 눈을 껌벅이고 있지 않았습니다. 심하게 이야기 하면 고샅에 개미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고 짐작대로 찌그러지는 막걸리 집에는 이제 저처럼 낡을 대로 낡은 주인장만이 잔기침을 쿨럭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한쪽 구석에 고스톱 패 세 명이 눈도 거들떠보지 않고 코 박고 있고요.
저 혼자 돌아 나와서 동네 한 바퀴 어슬렁거리다가 용케 형님 한분 만나서 붙잡아 끌고 다른 가게에가 차디찬 선술 한잔 먹고 돌아왔지요.

금년 겨울은 이런 면으로는 참 길 것 같습니다. 혼자 썩으며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되 가끔은 한 번씩, 아니 필요하면 언제나 몸이나 마음에 새 물갈이를 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되는데 지금 시골의 사회문화라고 하는 것은 순환이라는 게 없습니다. 문화자체가 없다 해야겠지요.

농촌이 다 이러지는 않겠지만 정말이지 관광지로 변한 농촌어촌은 사람 살데 가 아닌 듯합니다. 먹고 사는 것이야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작동되는 원리야 비슷비슷하겠지만 전통사회 단위 하나가 해체되어서 난개발식으로 전혀 다른 사회가 만들어지는 그 과도기적 현상은 차마 겪지 못할 것인 듯합니다.
어찌 보면 저 같은 사람은 이 사회의 부적응자여서 편입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나름 견고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두 살씩 나이 먹어가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어정쩡하기만 할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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