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퍼스트레이디’에서 세계 최고 갑부의 아내로

  
 
  
 
오나시스 충격

“오! 신이시여.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1968년, 미국인들은 TV, 라디오, 신문을 통해 발표된 재클린 케네디의 재혼 소식에 경악했다. 영원한 미국인들의 사랑,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재클린이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결혼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왜 하필 그런 새끼랑….”

“천박하고 짐승 같은 호색한 오나시스와 결혼하겠다니…. 바로 옆에서 남편이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봐야했으니 충격을 받아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
전 미국인들 사이에 육두문자가 오갔고, 오나시스를 저주하는 분노의 목소리들이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오나시스는 그리스에서 해양산업으로 큰 돈을 번, 당시 세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의 세계적인 갑부였지만 이미 육십이 넘은 나이에 투박하게 생겼으며,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에, 온갖 여자들을 섭렵한 난봉꾼의 이미지로 미국인들에게 비쳐졌다.

“그 우아하고 다정다감하며 지적인 우리들의 영부인을 그런 놈에게 뺏길 수는 없어….” 미국인들은 이런 심정이었다. 그래서 오나시스가 더욱 밉고 추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재클린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고 케네디 전 대통령과의 사이에 낳은 두 아이를 데리고 당당히 오나시스 가로 입성했다. 미국인들의 상실감은 극에 달했다.

미국인의 햇살

1951년 재클린은 워싱턴 정가의 한 파티에서 운명의 남자를 만난다.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이었다.
지적이고, 잘 생긴데다가,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는 이 상원의원은 이제 불과 34살의 총각으로 미국 미혼여성들의 우상 같은 존재였다.

둘의 눈빛이 마주쳤을 때 이미 존과 재클린은 깊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2년간의 열애 끝에 1953년 9월 12일, 재클린 부비에는 존의 아내가 되었다.

‘재클린 케네디’가 된 후, 그녀는 정치인의 아내로서 남편을 헌신적으로 보좌했다. 단지 ‘열심히’ 챙겨주는 아내로서가 아니라 남편의 정책에 의견을 제시하는 참모로서, 패션을 코디하고 연설문을 가다듬는 이미지 메이커로 활약했다. 또 그 자신이 열렬한 대중의 호감을 얻음으로써 존의 인기에도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61년, 존 F 케네디는 미국 제 3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불과 44세에 ‘세계 최고로 힘센’ 사람이 된 존 F 케네디의 백악관 입성은 아내 재클린의 내조가 절대적이었다.

한 줄기 햇살 같은 32살의 퍼스트레이디! 신선했다. 역동성과 화사함이 느껴지는 밝은 미소에 센스 있는 패션 감각과 갓 서른을 넘긴 풋내기답지 않은 위엄을 갖춘 이 새로운 백악관 안주인을 보는 미국인들은 마치 자기들의 조국의 미래를 재클린에게서 투영해 보는 듯이 그녀에게 열광했다. 케네디 부부는 전 세계 어디서나 단연 스타였다.

어떤 영화배우도 록 가수도 재클린의 인기를 능가하지 못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여왕까지도…. 세상은 케네디와 재클린의 것이었다. 1963년 11월 22일 달라스에서의 그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달라스의 암살 이후

1963년 케네디는 재선(再選) 유세를 위해 텍사스 주의 달라스를 방문했고 주민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 속에 카퍼레이드를 시작했다.
천천히 도로를 달리던 차가 어느 커브를 돌아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케네디 대통령이 고개를 재클린 쪽으로 툭 떨어뜨렸다.

“오 마이 갓!” 재클린의 외마디 비명 속에 케네디의 두개골에서는 이미 뇌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암살이었다.
케네디는 이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즉사였다.

미국 전역이 슬픔에 잠긴 채 케네디는 46세의 젊은 나이로 영면에 들어갔다. 케네디와의 10년의 결혼생활과 3년간의 미국 퍼스트레이디 생활도 막을 내렸다.
대통령 미망인이 됐지만 재클린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비교적 조용히 지내고 있었건만 대중의 관심은 언제나 용광로만큼이나 뜨거웠다.

그러다가 대중들이 화산처럼 폭발하는 일이 발생한 것은 5년이 지난 1968년의 일이었다. 전술했던 재클린의 재혼 계획 발표였다. 그러나 재클린의 재혼에 대한 궁금증은 미국인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재클린과 오나시스는 아무래도 ‘언 밸랜스’ 처럼 보였다. 더욱이 세계인들의 뇌리 속에는 아직도 존 F 케네디와 재클린의 ‘완벽한 그림’의 잔상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오나시스와 결혼

1968년 10월 17일 그리스 스코리피오스 섬에서 재클린과 오나시스는 결혼식을 올렸다.
‘아리스토틀 오나시스’는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주급을 받고 부둣가에서 막일을 하는 잡역부였으나 특유의 집념과 부지런함, 물불 안 가리는 과감성과 행운에 힘입어 세계적인 부호로 성장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갑부였다. 그는 재클린과의 신혼생활 1년간 무려 2천만 달러를 썼다.

그러나 결혼은 평탄치 않았다. 오나시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재클린을 하나의 ‘노획물’처럼 여겼다는 것이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힘 센 미국의 젊은 영부인이 내 마누라야’라고 뻐기는 듯했다. 재클린과 오나시스의 결혼 생활은 1975년 3월 오나시스가 파리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기 까지 8년 동안 이어졌다. 오나시스는 당시 돈으로 5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나는 재클린!

재클린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막대한 유산을 가지고 조용한 곳에서 칩거하고 지내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비웃듯 그녀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사실 오나시스는 재클린에게 별로 남겨주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기자 경험을 되살려 출판과 언론계에 뛰어든 그녀는 사업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보여줬다.
아직까지도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보수적인 미국 남부 상류층 인사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녀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랑은 다시 돌아왔다. 다시 미국인의 ‘재키(Jackie; 재클린의 애칭)’가 된 것이다.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 오나시스’는 사업가로서, 사교계의 리더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1994년 숨을 거두었다.
재클린은 케네디에 대해 “그는 나에게 인생 이상의 특별한 의미”라고 친구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케네디의 외도, 즉 마릴린 먼로 등 숱한 여배우와 미녀들과의 염문을 모른 척 묻어두며 엄청난 마음고생도 감수했던 사람이다.

재클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그녀의 처세에 대해 위선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중 앞에 서야하는 공인으로서 재클린은 ‘이미지 메이킹’을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생각했고, 삶 속에서 ‘남에게 흠 있게, 만만하게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다. 재클린은 현대 커리어 우먼의 아이콘이자 패션의 리더이기도 했다.

그녀는 최고 권력자와 최고 부자의 아내로 살면서, 또한 능력 있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성취를 일구어 현대 매스컴의 지면과 전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 미디어 퀸(Quee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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