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을 통 털어 어제 저녁이 가장 춥지 않았나 싶군요. 밤새 바람이 쌩쌩 불어 몇 번을 자다 깨곤 했는데 아침에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 밖에 나가니 희끗희끗 눈발이 몰아치고 샘가는 꽁꽁 얼어 튀어 있었습니다. 입춘 지났으니 봄인가 했더니 성급한 사람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겨울로 되돌아갔습니다. 서둘러 고무래로 재를 긁어내고 마른 잔가지들을 넣어 불을 붙이니 조금씩 온기가 생기기 시작 합니다. 추울 때는 불이 어머니보다 더 좋다더니 과연 그렇다 싶게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한동안 탈만큼 나무를 나우 넣어놓고 뒤 안 장독에 가서 항아리 몇 개 눈여겨 봐둡니다. 아직 장을 담지 못해서요. 제가 가지고 있는 항아리 중에서 두 번째 큰 것들인데 올핸 메주 양이 많아서 늘 쓰던 작은 항아리들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설 쇠고 첫 말날, 해마다 이날 장을 담는데 올해는 설이 늦어서 아무래도 그 안에 담아야겠지요? 그러나 날이 이렇게 추우니 조금 걱정스럽군요.

잠깐 동안이라도 이가 딱딱 마주치고 온몸이 굳어지는듯해서 도망치듯 부엌으로 뛰 들어와 불앞에 앉습니다. 불은 기세 좋게 타오릅니다만 좀체 부엌이 따뜻해지지 않는데 아내가 부엌에 나왔습니다. 조금 더 있다 나와도 될 텐데 오늘 조카가 하는 펜션에 청소하러 간다더니 그래서 서두는 가 봅니다. 이런 날은 그저 뜨겁게 밥 지어먹고 아랫목에 누워서 신문을 뒤적이던지 TV나 보는 게 좋을 텐데 약속해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일을 가야 하는 아내가 참 딱하고 측은합니다. 하루 일당은 오만원이랍니다. 청소해야할 객실이 많으면 보통 오후 네 시 무렵까지 점심도 거르다시피 하면서 일을 하는데 그에 비해서 돈 오만원이란 건 쓰자 하면 어디 쓸데가 있던가요? 주머니에서 꺼내어 깨는 순간 무엇 하나 변변하게 산 것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남편이랍시고 돈 한 푼을 벌어다주지 못하는 답답서니이니 아내가 저를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내가 일을 나가는 날은 집안일이라도 제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전 11시. 입맛 없다고 아침을 거르기 일쑤인 아들 녀석이 자꾸만 배가 고프다고 조릅니다. 지 애비보고 라면 끓여달란 얘긴데요, 라면도 남의 손으로 끓여 먹어야 맛이 더 좋은지 한사코 아빠가 끓인 라면이 제일 맛있다는 말에 그 속셈을 알면서도 번번이 못이기는 척 끓여다 바칩니다그려. 그러면서도 후루룩 쩝쩝 먹어대는 녀석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는 이 눈먼 부정이라니-.

약 이주 전에 마당 앞 연못에서 밤새 개구리들이 울어대더니 그 이튿날인가 삿 날 얼핏 연못을 들여다보니 알 무더기가 세 군데나 보였습니다. 그래 한동안 들여다보는데 아하! 요놈들이 알을 낳아 놓고서는 알 옆에 숨어서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게 암컷일까 수컷일까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몸짓으로 보아서는 암컷입니다. 좀 크고 배가 훌쭉한 걸로 보아서요. 수컷은 암컷의 삼분의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분명 암컷인데 이상하게도 저는 애비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의 이 눈먼 부정이 가당찮게 개구리에게 투사된 때문이겠는데 며칠사이에 못 물이 줄어드는가 싶어 수도 호스를 끌어다 물을 깊게 한번 넣어 주었더니 용케도 그날 저녁, 오늘만큼은 아니어도 날이 몹시 주워서 연못이 꽁꽁 얼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혼자 속으로 ‘개구리에게 참 표창 받을 일 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일 없이 벌써 오후 한시, 혼자라도 점심을 먹을까 말까 생각하고 있는데 밖에 웬 차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낯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카메라들을 메고 지고 한 걸로 보아 봄 야생화 찍으러 다니는 사람들임을 알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밖에 나갈 일이 있는데 제 차 앞을 막아 놓은 듯해서 따로 주차할 곳을 한군데 정해 주려고 말을 걸게 되었습니다. 방송사에서 나왔다는군요. 이 추위에 웬 꽃이냐고 했더니 방송사라 어쩔 수 없다내요. 이해가 갑니다. 눈발이 사정없이 몰아치다 그치기를 되풀이 하는데 그 속에서 찾아내 카메라에 담아 시청자들에게 전해 주는 일, 하지만 무슨 꽃이 벌써 피었겠냐 했더니 어디 산 어디 절 뒤에는 벌써 바람꽃이며 복수초가 피었다고 꽃 소식을 제게 먼저 전해주는군요.

그 사람들이 저의 집 뒤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담 옆의 매화에게 눈을 던지니 대처나 꽃 봉우리가 벌써 큰 것은 솜 봉 만큼씩이나 자랐습니다. 저걸 끊어다 화병에 꽃아 책상 앞에 두면 사나흘 후면 꽃을 볼 것 같습니다. 이 추위에 아랑곳없이 필 것을 준비하는 매화를 보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가 오히려 생각하기 따라서 정신의 보양이 되는, 하지만 자칫 세상사 모두 마음먹기 달렸다는 일체유심조적 과잉 해석이나 처방이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 즉설식으로 어지러운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어쨌거나 올해는 꼭 매화 분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저 혼자에게 그리하기로 해놓고 어영부영 지나가 버렸는데 올해는 홍매 청매 묘목 두개만 사서 좋은 화분에 기를 랍니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마음 줄 곳 하나 있는 것도 괜찮겠는데 저는 식물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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