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 참 좋은 날입니다. 쉬지근한 세대여서 그런지 양력12월31일 보다는 음력섣달그믐 이라야 한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기분이 납니다. 물론 금전 정리 따위의 형식적 마무리는 양력으로 합니다만 마음의 마무리는 음력인 듯합니다. 설날 아침의 차례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장을 보아다가 차례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경건한 마음이 중심에 놓여야 하는 것이어서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지금은 설빔이라고 하여 옷을 사는 것도 아니지만 여기저기 돈 쓸데가 많은 마음의 중압은 우리 살림살이를 돌아보게 하는, 그래서 잠시나마 마음에 기름기 없는 맑은 것으로 됩니다. 옛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했지만 정신의 넉넉함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설은, 오래된 미래입니다.

며칠 전에 마을에 내려갔을 때 어업을 하는 후배 한명이 “이번 설에는 볼만하겠다” 했습니다. 왜? 하고 물으니 어업을 하는 사람들이 단체로 배의 깃발을 장만했다더군요. 내가 놀래서 “배 새로 지어 왔을 때 하는 그 삼색기 말이지?” 했더니 아니 오색기랍니다. 희고 검고 붉고 파랗고 누우런 오색기 말이지요. 그러고서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데 작년에 자기 배와 또 다른 어부의 배 두 척에 기를 해 달았더니 나머지 어부들이 그게 보기 좋았던지 올해는 다들 하기로 해서 단체로 만들어다 뒀다고요.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하고 마음이 참으로 기꺼웠습니다. 그리고는 배마다 푸른 대나무에 매달려 바람에 펄럭이는 그 깃발들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그럼 고사들을 지내지 않나? 기 했으면 고사를 지내야 제격이지 그래야 고기도 많이 잡고 어장사고도 나지 않지!” “글쎄 그것까지는 몰르겄네” “하긴 대보름날 하는 용왕제가 합동 고사이긴 해. 그때 정성을 들이면 되는 게지 그믐날 배 옆에서 굿이나 신나게 치세나” “ 누가 굿 칠 놈이 있어야지” “자네가 장구치고 내가 쇠치고 징만 누구하나 붙들어다 치게 하면 되잖어? 꼭 여럿이만 쳐야 맛인가 셋이라도 굿 소리 내고 흥나면 고만이지” 이래서 섣달그믐날 실로 몇 년 만에 굿을 치게 되었습니다.

저의 동네는 당산제를 초하룻날 밤에 하기 때문에 일 년에 한번 또딱거리 일망정 굿 소리 납니다만 옛날처럼 섣달그믐에 배에 기 꽂아 놓고 굿을 치자 약속을 하니 저는 하루하루 어린아이처럼 손을 꼽아가며 이날을 기다렸답니다. 또 옛날이야깁니다만 그때는 지금처럼 모터를 단 1톤 안팎의 선외기가 아니고 10톤가량 되는 커다란 꽁댕잇배였습니다. 당연이 바람에 의존하는 돛배였고요. 이런 배 약 스무척정도가 마을 앞바다에 묶여 있는데 이게 그믐날 오후 두세 시 무렵 되면 바닷물이 가득 들어와서 배가 뜨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선실에 고이 간직해뒀던 기를 내어 달고 고사를 지냈습니다. 일 년을 무사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고사이며 내년에도 사고 없이 고기 많이 잡게 해달라는 고사입니다. 어부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제사도 제사지만 이 배 고사는 더 깨끗하게 모시려고 합니다.

떡을 해도 떡시루에 백지를 깔고 백설기를 하며 제물을 진설할 때도 배를 깨끗이 닦고 돗자리를 펴고 또 그 위에 백지를 펴고 합니다. 술을 따르고 절을 하고 백지로 접은 소지를 몇 장이고 올리면서 남 알아듣지 않게 속으로 뭣이라 뭣이라 빌고 또 빌고 또 절을 올립니다. 그런 다음에 멀찍이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불러 술을 나누지요.
배마다 이렇게 고사를 지내니 그믐날 저녁때 한나절은 이배 저배로 건너다니며 술 먹는 게 일이고 그리고 흥이 나서 굿을 칩니다. 집집마다는 아니어도 밤을 새워 이집 저집 술잔이나 나올만한 집을 돌아다니며 굿을 칩니다. 이 굿이 매귀굿입니다. 나쁜 귀신을 묻어버린다는 의미의 굿이지요. 저는 어느 책에 ‘섣달그믐날 굿 소리 나지 않는 동네를 고향이라 할 수 있겠나’라고 썼습니다만 지금은 사정이 어떻습니까? 굿 소리 나는 동네가 몇이나 있던가요?

섣달그믐, 제가 마을에 내려간 것은 오후 세시 무렵입니다. 묵은 세 배 한답시고 어른 있는 몇 집과 친척집 몇 집을 돌았더니 어연간 술이 얼큰했고요. 그렇게 돌아서 배들이 묶여있는 방파제 쪽으로 갔습니다. 깃발이 눈에 들어옵니다.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것이 바람에 펄럭입니다. 그러나 며칠 전의 상상과는 달리 저는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배도 다르고 사람도 다 다른데 왜 기만 철편일률로 한가지냐고요. 내 원 참! 하다못해 풍어라는 글씨 두자도 쓰지 못하냐고요 내 원 참! 꽁댕잇배 때는 지금 저 가볍디가벼운 다후다 나일론도 아니고 광목 깃발이었는데 깃발에 지내발도 달고 용도 그려 넣고 글씨도 써넣었답니다. 배 선실 안에는 깨끗한 상자에 사람 옷도 한 벌씩 넣고 다녔고 고사지내고 남은 백지는 그 상자 밑에 깔아두었죠. 집안의 성주단지 같은 것입니다. 사람 옷은 배의 신체가 여신인 것이라 여성의 한복이었고요.

우리는 종종 연을 부치다가 백지가 없으면 남의 배에 몰래 들어가 그 성주 상자의 백지를 훔쳐내다가 연을 부치곤 했지요. 대보름까지만 연을 날릴 수 있으니 다시 제 마음속엔 저 멋대가리 없는 깃발대신 하늘높이 나는 연만 보였습니다. 굿은 잠깐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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