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건 양
농촌진흥청 농업공학부장


“베사메 베사메무초 /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 베사메 베사메무초 /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외국곡에 현동주 님이 노랫말을 붙이고, 현인 선생이 노래한 ‘베사메무초’에 나오는 한 소절이다.
여기에 나오는 ‘리라꽃’은 요즘 한창 자태를 뽐내고 있는 ‘라일락꽃’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다. 프랑스어로 ‘리라(lilas)’는 라일락 또는 자홍색을 뜻하며, 영어로는 우리가 잘 아는 라일락(lilac)이다.
오므렸던 입을 벌리듯 네 장의 꽃잎이 활짝 열리는 라일락의 꽃을 보노라면 향기를 가득 담은 풍선이 순식간에 터지며 그 속의 향기를 밖으로 뿜어내는 모습이 떠오른다. 연분홍빛 꽃잎, 피어오른 올망졸망한 꽃들······. 라일락꽃은 그 자체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아 꽃잎에 집중시키고, 진한 향기로 후각마저 사로잡는다.

외국에서 장미, 카네이션, 튤립을 사다 잘 키워 세계 시장에 내다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들꽃을 잘 다듬어 세계적인 꽃으로 만드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리 꽃 속에는 우리 문화가 들어 있고, 우리 넋이 들어 있고, 우리 삶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수수꽃다리는 수수에 꽃이 달린 것처럼 보이고, 수수모양으로 꽃이 달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가 붙인 우리나라 꽃의 이름은 이렇게 멋지다. 선플라워보다는 해바라기가 멋지고, 클로버보다는 토끼풀이 예쁘고, 코스모스보다는 살살이가 더 곱다. 솜다리꽃을 에델바이스라고 하고, 붓꽃을 아이리스라고 하며, 담쟁이덩굴을 아이비라고 해야 교양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베사메무초라는 노래에 나오는 ‘리라꽃’이 라일락의 프랑스말이고, 라일락이 원래는 우리 꽃 수수꽃다리였다는 것을 알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더 교양 있어 보인다.

  라일락은 빼어난 모양새, 기가 막힌 향으로 봄날을 찬양하는 자리 말고도 식물자원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1947년 미군정청 소속의 식물 채집가 엘윈 M. 미더(Elwin M. Meader)가 북한산 백운대에서 얻은 물푸레나무과 꽃 종자를 미국으로 가져가 키를 작게 하고, 꽃 색깔을 보라색으로 개량한 것이 지금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는 라일락이다. 우리가 수수꽃다리를 잘 다듬어 세계적인 상품으로 만들었다면 라일락이 아니라 ‘수수꽃다리’라는 멋진 이름으로 세계 꽃시장을 주름잡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기에 보라색 라일락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아려온다.

식물분류학적으로 보면 수수꽃다리와 정향나무, 개회나무는 모두 물푸레나무과이고 수형이나 꽃 모양도 전문가가 아니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 자생꽃은 잘 지켰어야 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꽃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해 지금은 그 꽃이 미국 꽃이 되어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게다가 그게 고작 70년 전의 일이다.

꽃이나 식물의 품종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원종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양한 특징의 원종이 많아야 새로운 품종을 만들고 개발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선진국이 원종을 확보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시장에 뛰어드는 중이고, ‘종자전쟁’이니 ‘유전자전쟁’이니 하는 말이 생긴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우리도 이제라도 우리 고유의 품종을 지키는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요즘은 꽃을 키우는 화분도 인터넷과 연결시켜 시간과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 식물을 관리할 수 있게 똑똑해졌다. 사물인터넷을 통해 식물의 건강상태를 모니터링하고, 필요하면 물도 준다. 아직은 구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화분이 스스로 빛이 잘 드는 곳을 찾아가기도 할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빨리 변하고, 그 중심에 IT강국으로 우리나라가 우뚝 서 있다.

비록 수수꽃다리는 뺏겼지만, 사물인터넷을 활용한 똑똑한 화분은 뺏기지 않기를 바란다. 식물자원도 우리의 소중한 자원이지만, 과학기술도 우리와 미래 세대를 먹여 살릴 결코 뺏길 수 없는 산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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