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비둘기들 보기 싫어서, 그놈들 약 좀 올리려고 콩 모종을 포트에 냈다는 이야기는 얼마 전에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그 콩 모종을 마당에서 열흘가까이 길러서 밭에 심었답니다. 128구멍짜리 서른 판을 키워서 포기사이 25cm 이랑너비 75cm로 심었더니 약 200평가량의 콩밭이 되었습니다. 비가 온 뒤 3일후에 밭을 갈았더니 물기가 알맞아서 콩 모종을 내기도 좋고, 그러니까 심고 물 줄 일도 없었죠. 이야기가 거꾸로 되는 듯 합니다만 심을 때는 줄을 때고 심었어요. 삐뚤삐뚤한 모습은 저는 물론이거니와 안식구도 몹시 싫어하거든요.

그렇게 모종을 내고서 바라보니 거 참 콩밭이 예쁘기 짝이 없습디다. 금세라도 콩잎이 쑥쑥 자라서 이랑을 다 덮어버리는 것 만 같은 착각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저희는 참 이상하게도 이런 건 잘하는데 파는 건 젬병이라 나중일이 조금 걱정은 됐지만 여름 농사 중에 콩은 뺄 수 없는 것이지요. 심은 이튿날 아침 일찍 콩밭에 나가 봤습니다. 작물은 아침 일찍 이파리에 이슬을 달고 있는 모습이 제일 예쁘거든요. 그런데 첫머리에 콩이 몇 포기 뽑혀 있는 게 눈에 띄어서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니 이번에는 떡잎만 남기고 속잎이 뚝뚝 끊어진 게 줄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라니입니다. 부드러운 흙에 찍힌 발자국과 한입 먹고 해찰하고 한입 먹고 건너뛴 모습이 고라니 아니라고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호랑이를 피하니 늑대와 여우를 만난 격입니다. 심어서 땅 맛 알고 이파리가 자랄 때는 조금 뜯어먹어도 순 집어준 샘이 되니까 괜찮은데 아예 처음부터 싹을 잘라버리니 속수무책입니다. 예전에 설치한 목책기도 멧돼지를 막아 내는데 는 아무 소용이 없고 밭을 관리하는데 불편하기만 해서 얼마 전에 다 걷어 치워 버렸거든요.

작년에도 콩밭이 이랬습니다. 떡잎만 남기고 속잎만 똑똑 따 먹어버려서 이제 틀렸다 생각했는데 콩은 떡잎사이에서도 새순이 나오긴 나오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콩이 열리긴 하는데 키가 한 뼘 정도 밖에는 자라지 못하고 꼬투리도 아주 적게 달립니다. 밤에 지켜야 될까요? 평소에 꺼두었던 밭 근처의 가로등을 켜 놔 봤습니다만 소용없이 다음날 뜯은 것은 더 늘어났습니다. 밭 주변에는 콩잎과 비슷한 칡순이 지천인데 굳이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며 꼭 콩잎만 먹어야 합니까?

그래 속절없이 콩밭 주위나 돌아보며 무슨 대책이 있나 생각해보지만 뾰족하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서성이다 어제는 밭 귀퉁이를 지나는데 밭과 닿아있는 산그늘에서 후다닥하며 무엇이 달아나는군요. 그 무엇이라는 게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는 고라니, 바로 그놈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멈춰서 멀거니 녀석이 달아나는 꽁무니만 바라보는데 달아난 그 자리에 또 한 마리의 고라니의 엉덩이가 예쁘게 보입니다.
저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어요. 고라니가 앉아있는 머리 쪽에 가로 놓인 막대기로 봐서 어디서 올무에 걸린 채 올무 맨 막대기까지 끌고 와서 앉아 있겠거니, 그래서 바짝 다가가서 손뼉을 치며 워이 워이 외쳐봤습니다. 그 순간 아주 작고 앙증맞은 고라니 새끼가 폴짝 뛰어서 한번 고꾸라질 듯하다가 어미가 달아나는 방향으로 뛰어가는 겁니다.

고라니 새끼를 이렇게 만난 것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새끼가 아직 젖이나 먹겠지요? 덮쳤으면 고라니새끼 한 마리 품에 안을 수 있었는데, 그래서 인증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놓고 어미 애 좀 태워주다가 놓아줄 수도 있었는데 바로 손앞에서 콩 농사를 망치는 악동들을 고이 보내고 아쉬워했습니다. 허나 잡아본들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결국 잠시 잠깐 놀다가 어미 곁에 보내고야 말 것이지요.
저녁나절에 밖에 나갔다가, 정확하게 말하면 면소재지에 있는 농협에 갔다가 친구를 만났습니다. 유기농 하는 친구인데 요즈음 옥수수 출하가 한창이라더군요.

그런데 그 친구 얘긴즉슨, 요 며칠 사이에 멧돼지가 내려와서 약200평 정도의 옥수수 밭을 완전히 망쳐놨답니다. 옥수수 밭 200평이면 아마 멧돼지가 대식구로 내려온대도 스무날 이상 일용할 양식일 텐데 멧돼지가 그렇게 떼거리로 내려올 턱은 없겠고요.
나중 말 들으니 멧돼지 놈들이 옥수수를 그냥 한 번씩 깨물어 놓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데 배부르면 옥수수 밭에서 얼씨구! 막 뒹굴고 논 다네요. 그 친구도 아내가 사흘이나 트랙터 시동해 놓은 채로 밤을 샜다더군요. 그런데도 바로 옆에 보이지 않는 곳을 또 망치곤 했다고 올무라도 놓아봐야겠다고 재료를 사러 나온 거였습니다.

말하기를 멧돼지가 아니고 백여우라고 말해서 둘이 한참 웃었습니다. 이쯤에서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정부는 이런 피해가 발생해야만 뒷북치는 식으로 엽사를 동원 한다 어쩐다 하는데 개체수를 알맞게 조정해서 피해농가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대책 좀 세우면 안 되는 건가요. 그 친구는 누군가 불법이라고 신고를 할까봐 두렵다고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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