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가 지났으니 여름더위가 숨 가쁘게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다고 해야겠지요. 앞으로 입추 지나 처서 무렵까지 약 스무날 정도는 더위를 견뎌야 할 것 같습니다. 열두시쯤 해서 오전 일손을 놓게 되는데 요즈음은 장마가 져서 습도가 높은 탓인지 오전은 그저 후텁지근하고 불쾌하기만 합니다. 끈적끈적한 공기가 몸을 휘감고 놔주질 않는 통에 일어섰다 앉았다 할 때마다 옷은 몸에 척척 들러붙고 땀이 솟아납니다. 구름이 햇빛을 완전히 가리면 그래도 좀 나은데 옅은 구름이 따가운 태양을 가릴 똥 말똥하고 지나가면 다음엔 이마가 벗겨질 정도로 뜨겁고 훅훅 단내가 나도록 쪄댑니다.

이럴 때 하늬바람 한줄기가 휘몰아쳐 와야 이것들을 몰고 가버리는데 여름에 서풍이나 북풍을 기대 할 순 없겠죠. 그래도 오전에는 견딜 만합니다. 무슨 일을 하던 아침부터 서서히 달궈지는 열기에 몸도 따라서 맞춰가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오후입니다. 하루를 두고 말하면 더위가 가장 절정인 때는 12시부터 3시 무렵까지, 아니 4시까지인데 이때는 씻고 점심 먹고 시원한데서 쉬었던 참이라 다시 햇볕에 나오려면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적응이 되지 않는 거지요. 그래도 3시에는 나가서 일을 해야 합니다. 4시에 나가면 오후 일을 많이 할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4시쯤 나가서 일하는 게 맞다 싶어요. 아껴둔 힘을 산그늘 내리고 선선할 때 써야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서요. 3시부터 나가서 일해 보니 더위에 지치고 몸에 힘 빠져서 정작 시원할 땐 일을 못하게 되더라는 거지요. 그랬더니 안식구 생각은 다르더군요. 여긴 산골이라 모기 등쌀에 저녁을 늦게 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보통 봄부터 가을까지 마루에 앉아서 밥을 먹어버릇하니까 조금이라도 늦는다 싶으면 모기란 놈들이 눈알까지 빼먹으려고 덤빕니다. 아내는 그것 싫어하는 겁니다. 하긴 같이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을라치면 눈치 없는 모기 녀석들이 저에게는 별로 덤비지 않고 아내에게만 떼로 덤비긴 합니다. 제 거무데데하고 힘줄만 있는 살보다는 아내의 살이 더 연하고 달아서 일겁니다.

어쨌거나 더위가 아무리 기승을 부린다 해도 집과 밭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하는 일은 참 견딜만하고 리듬이 있기까지 합니다. 아침 일찍 먹고 커피한잔은 여유를 부리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장화신고 모자 쓰고 장갑에 호미 들고 밭에 가면 두 시간은 일을 합니다. 그 다음에 잠깐 집에 와서 나무 밑이던 우물 가던 편한 대로 그늘에 앉아서 간단한 새참을 먹습니다. 그게 길어야 15분, 다시 밭에 가서 12시까지 일하고 돌아와 씻고 점심 먹고 쉬다가  오후에도 오전 일을 뒤풀이하는 이런 일상은 어찌 보면 한가롭고 목가적인거지요.

김맬 거리가 제 아무리 많다 해도 이런 나날이 쌓이다보면 언젠가는 끝이 나겠고요. 날마다 흘리는 땀의 양에 비례해서 오늘도 개으르지 않고 여름 지기의 소임을 다했다는, 또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는 뿌듯한 자부심도 함께 쌓여가기도 합니다. 문제는 뜻하지 않은 일로 일하다말고 들어와 씻고 거추장스런 출입복을 갈아입고 밖에 나가야 하는 일에 있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있으면 땀을 흘려야 제격인데 출입복을 입고 땀을 흘리려면 어찌 그리 하찮고 불편하고 불쾌한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니까 냉방시설이 된 사무실 같은 곳을 찾게 되고 차 안에서도 에어컨을 켜게 됩니다. 나가서 사람 만나는 일. 만나서 처리하거나 수행해야 될 일. 함께 술 밥을 먹는 일조차 여름은 피곤합니다. 이걸 생각하면 제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내 집 내 밭에서 꾸벅꾸벅 일하는 것이 가장 좋은 여름나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일하다가 저는 가끔 발을 벌리고 서서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처박고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날마다 보는 똑 같은 풍경이 물론 거꾸로 보니까 달라 보이겠는데 그게 그렇게 낯설고 새롭고 이국적 모습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믿기지 않으면 지금 당장 그 자리에서 저처럼 해 보십시오. 분명히 뭔가 달라 보입니다. 생각까지 도요.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어서 꼭 내 맘대로,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만은 없습니다.  일하다 말고 꼭 미친놈처럼 가랑이 벌리고 서서 고개 처박고 뭔가를 하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의 행위는 일이 힘들고 때론 심심하기도 하고 장난기도 생겨서이지만 나름 균형과 조화를 맞추기 위한 저만의 방식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며칠 동안 비와 소나기예보가 있었어도 아무것도 오지 않아서 덕분에 일주일 넘게 김을 참 열심히 맸는데 오늘은 태풍이 밀고 올라온 장마전선 때문이라고 비가 옵니다. 아침 먹고 커피한잔 먹고 있는 새에 비가 와서 오늘은 작업복 갈아입을 필요도 없이 느긋하게 TV에 눈을 주고 있는데 안식구는 어디서 일회용 비옷을 하나 챙겨 나오더니 그걸 입고 호미 들고 나갑니다. 들깨모종을 조금 더 옮겨야 된다나요 기왕에 옮겨 놓은 것만 가꾸자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아마 조금 부족하다 싶은가 봐요. 금방 끝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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