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건 양
국립농업과학원 농업공학부장


“농진청에도 수도과가 있던데, 거기서 상수도도 놔줘?”, “시비 붙은 사람들은 경찰이 갈라줄 텐데 농진청이 왜 시비 관리를 해?”
1980년대 후반 농촌진흥청에 막 들어왔을 때 형님이 했던 말이다. 농업을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수도’를 보면 ‘상수도’가 떠오르고 ‘시비 관리’를 들으면 ‘경찰서’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업에서 쓰는 수도(水稻)는 논에 물을 대서 심는 벼를 뜻하며, 시비(施肥)는 거름 주는 것을 이르는 농업 ‘전문용어’이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근대 농업을 이르는 낱말에 일본식 용어가 많이 있다. 수도나 시비도 모두 그런 낱말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낱말이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고, 지금도 농업 교과서에 그대로 쓰이고 있다. 나라는 광복을 했으나, 농업 용어는 아직 광복을 못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농업용어는 국민들과의 소통도 가로막고 있다. 농촌진흥청 직원들은 늘 보고 듣는 낱말을 써서, ‘다비하면 도복합니다’, ‘마늘 생산량을 늘리려면 일관기계화가 필요합니다’, ‘도장지 관리를 잘해야 과일이 튼튼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이 말을 알아듣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비하면 도복합니다’는 ‘비료를 많이 주면 잘 쓰러진다’는 뜻이고, ‘마늘 생산량을 늘리려면 일관기계화가 필요합니다’는 ‘마늘 생산량을 늘리려면 씨뿌림부터 수확까지 모든 과정을 기계화해야 합니다’라는 뜻이며,  ‘도장지 관리를 잘해야 과일이 튼튼합니다’는 ‘웃자란 가지를 잘 관리해야 과일이 튼튼하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일본식 농업용어는 농업기술의 저변확대를 가로막고 있다. 좋은 농업기술을 개발해놓고도 ‘우리만의 잔치’로 끝나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농업용어도 광복이 필요하다.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는 누리집에서 ‘소통’을 찾아보면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이라는 뜻과 함께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라는 풀이가 올라 있다. 자고로 뜻이 잘 통해 오해가 없어야 소통이 잘되는 것이다. 같은 사전에서 ‘일관’을 찾아보면 “하나의 방법이나 태도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음”이라는 풀이만 나와 있다. 바로 처음 먹은 마음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초지일관(初志一貫)의 뜻이다.  그러나 농업에서 쓰는, 씨뿌림부터 수확까지의 모든 공정을 아우른다는 뜻풀이는 없다. 농촌진흥청에서 쓰는 ‘일관’과 일반 국민이 아는 ‘일관’의 뜻이 달라 오해할 수밖에 없다.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일관’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농업공학부에서는 자체 토론을 거쳐 ‘일관’을 대체할 낱말로 ‘전 과정’과 ‘일괄’, ‘모든 과정’을 골라냈고, 이 낱말을 놓고 농촌진흥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전 과정’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41.3%, ‘모든 과정’이 더 낫다는 의견이 39.0%로 나왔다. 공공기관의 언어사용을 지원하는 국립국어원 공공언어 지원 전문가의 검토를 받은 결과, ‘일관’을 대체할 낱말로 ‘전 과정’과 ‘모든 과정’ 둘 다 사용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따라 농촌진흥청에서는 앞으로 ‘일관’을 ‘전 과정’으로 바꿔 사용함으로써 국민과의 ‘오해’를 줄여나갈 것이다. 동시에 ‘수도’라는 낱말을 ‘벼’로 바꿔 쓰고 있는 것처럼, 농업 전공용어로 남아 있는 일본식 말투도 깨끗한 우리말로 바꿔, 농업용어에도 광복을 맞게 할 예정이다.

‘소통’은 어려운 게 아니다. 눈과 입에 익어 자주 쓰는 말이지만, 나만 알고 남들은 모르는 낱말을 찾아 알기 쉽게 바꿔줌으로써 오해가 없게 하는 것도 소통의 첫걸음이다. 더불어서 근대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일본식 농업용어를 알기 쉬운 우리말로 다듬는 것도 광복 70주년을 맞아 꼭 챙겨야 할 우리들의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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