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진 오를레앙의 ‘성녀’

  
 
  
 
전편줄거리) 서기 1429년, 영국과 그에 협조하는 프랑스 귀족 가문 ‘부르고뉴’ 집안에 의해 위기에 몰린 프랑스 왕세자 ‘샤를’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프랑스를 구하고 왕세자를 지키기 위해 왔노라”는 열여섯 살짜리 소녀가 나타난다.

잔 다르크라는 이름의 소녀를 ‘미친 아이’ 쯤으로 여기던 샤를은 지역 사령관의 말을 듣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소녀에게 군대를 떼어준다. 소녀는 번쩍이는 전신갑주에 흰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며 영국과 프랑스의 전략적 요충지인 ‘오를레앙’에서 결정적 승리를 얻어낸다. 이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나갔으며,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던 샤를은 대관식을 거행하고 ‘샤를 7세’에 즉위한다. 잔 다르크와 그녀를 ‘신이 보낸 전사’로 믿는 프랑스 병사들은 내친김에 ‘파리’까지 점령하고자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왕은 우물쭈물하다가 파리를 눈앞에 두고 철수를 명령한다. 잔 다르크는 크게 상심하는데….


음모의 계절
“그 동안 수많은 격전을 치렀으니 좀 쉬도록 하자. 남쪽 루아르 쪽으로 내려가서 전열을 재정비하자꾸나.”(샤를 7세)
“그러나 왕이시여.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것입니다.”(잔 다르크)
“아무소리 말고 내 말을 따르도록!”(샤를 7세)
잔 다르크 덕분에 왕위까지 오른 샤를 7세는 이런 인물이었다.
유악하고 겁 많은 샤를 7세는 더 이상의 전쟁을 원치 않았다. ‘이제 정식 대관식도 치러 왕위에 올랐겠다, 나라 땅이야 조금 빼앗기면 어떻고 백성들이야 영국 놈들 점령 하에서라도 행복하면 그만이지….’
1429년 9월 22일 왕은 군대마저 해체하고 장군들과 병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해 4월 27일 잔 다르크의 출병 이래 5개월 동안 프랑스의 빛나는 영광은 어디로 갔을까?
그는 단지 충성심 강한 잔 다르크와 그녀의 휘하 병력만 곁에 두었을 뿐이다.
“저항이 심해 힘들긴 했지만 파리를 눈앞에 두고 왕은 왜 우리 군대를 철수시켰을까?”
“그러게 말이야. 조금만 더 공격했으면 파리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병사들의 궁금증은 곧 이유가 밝혀진다.
잔 다르크가 나타난 후 정통 귀족들과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그녀에 대한 의혹과 질투, 험담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하나님이 보낸 소녀라는 믿음으로 잔 다르크를 추종하는 병사들도 그렇고, 더욱이 그녀를 성녀로 까지 받드는 민중들은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가!
‘만약에 저 아이가 백성들을 부추겨 들고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달은 기울고…

잔 다르크는 ‘부르주’ 등의 마을에 머물면서 병사들과 함께 백성들을 도왔다. 무너진 집을 세워주고, 병자를 돌봤고, 굶주린 이에게 식량을 나눠줬다. 그녀가 추앙받으면 받을수록 ‘윗분’들은 불편했다.
그즈음 잔 다르크는 소규모 전투를 몇 번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주로 가난한 백성들을 도우며 겨울을 보냈다. 1429년 12월 왕은 잔과 그 가족들에게 귀족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듬해가 시작되자 ‘부르고뉴’가의 공격이 거세졌다.
“왕께서 대관식을 치룬 랭스도 다시 적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생겼어. 엄청나게 공격받고 있다는 거야.”
“콩피에누 지역까지 위험하대. 정말 큰일이군. 작년에 아예 파리까지 점령하고 적들을 확 몰아냈어야 하는 건데….”
소식을 들은 잔 다르크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1430년 5월 23일 잔 다르크는 밤길을 재촉해 콩피에누로 달려갔다. 잔 다르크의 돌격대는 용맹을 떨치며 부르고뉴 군을 격퇴했지만 영국군들이 끝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수적으로 불리해진 잔 다르크 부대는 수세에 물리기 시작한다.
“아니 영국 놈들은 저렇게 계속 몰려드는데 우리 프랑스 군은 도대체 왜 증원군을 한 명도 보내지 않는 거야?”
“아~ 이젠 버티기가 힘들구나.” 프랑스군은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탈진하기 시작했다.
“후퇴~ 후퇴~ 후열로부터 빨리 퇴각하시오.” 어쩔 수 없는 퇴각이었다. 잔 다르크는 맨 후미에 남아 방어하다가 그만 말 위에서 떨어지고 만다. 벌떼처럼 달려든 적들에게 잔 다르크는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됐다.
‘부르고뉴’ 공작에게 희소식 중의 희소식이 들어왔다.
“뭐라고 잔 다르크를 생포해 왔다고? 그것 참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소식이구나.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비정한 왕이여

“프랑스 왕에게 ‘잔’의 몸값을 요구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탈환한 땅도 돌려달라고 할 작정이다. 어서 이 같은 뜻을 전할 편지를 만들어라.”
부르고뉴 공작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샤를 7세에게서는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잔 다르크 덕에 왕위에 올랐고, 그녀 덕에 온갖 영광을 누리고 있는 바로 그 프랑스 국왕이….
왕은 끝내 잔 다르크를 모른 척 했다. 이 같은 와중에 잔 다르크는 탈출을 위해 성(城)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등 여러 번 도망쳤고 그때마다 잡혔다.
부르고뉴 백작은 잔 다르크를 교회에 넘겨 종교재판을 받게 하기로 결심한다. 부르고뉴 백작은 당시 영국에 점령당해 있던 노르망디 지역의 주교 ‘코숑’에게서 1만 프랑을 받고 잔 다르크를 넘겼다. 왕은 끝내 모른 척 했고 어떠한 구출시도도 하지 않았다.
1431년 1월 31일부터 그녀에 대한 종교재판이 시작됐다.
“너는 19년 전 돔레미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지?”
“예.”
“너는 열두 살 때부터 미카엘 대천사가 나타나 계시를 주었다고 했다. 사실인가?”
“예.”
“열 여설 살에는 다시 천사가 나타나 프랑스를 위해 싸우고 샤를을 프랑스 국왕에 오르도록 도우라고 했다고도 주장했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모든 여러분. 이 아이가 마녀라는 것은 이렇게 명백합니다. 이 아이는 감히 신과 인간의 중재자인 성직자도 없이 직접 천사를 만나고 신과 교감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성모독이며 당연히 이 아이는 마녀로서 처형되어야 합니다.”
잔 다르크가 마녀가 되면 마녀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른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권위도 무너지게 되므로 그들은 더욱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아갔다.
“거기다 저 끔찍한 몰골을 보십시오. 여자가 남자처럼 머리를 자르고 남자 옷을 입고 다녔으니 이 또한 신성모독입니다.”
잔 다르크는 아무도 변호해 주는 사람 없이, 교황에게 항소할 권리도 박탈당한 채 70명이 넘는 법률 단에 둘러싸인 채 외로운 싸움을 전개해 나갔다. 잔 다르크는 조목조목 놀라운 신앙지식과 논리 정연한 어조로 그들을 놀라게 했으나 결국은 그해 5월 29일 잔 다르크는 ‘화형집행’을 언도받았다.
글을 모르는 잔 다르크는 자신의 판결문에 뜻도 모른 채 서명해야만 했다.

슬픈 최후, 그러나 신의 축복

잔 다르크는 다음날인 1431년 5월 30일 화형에 처해졌다. 형틀에 묶인 잔 다르크가 말했다.
“십자가를 높이 들어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라고 크게 외쳐주세요. 내가 불타면서도 화염 속에서 그 구절을 들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불쌍한 잔 다르크는 왕의 비열한 배신과 간교한 ‘어용 종교 재판단’에 의해 끔찍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 세 번이나 태워진 잔 다르크의 재는 세느강에 뿌려졌다.
혜성처럼 나타나 프랑스를 구하고, 프랑스 왕을 프랑스 땅에 세웠으며, 백성들의 자존심을 지키고, 그들을 위해 헌신했던 프랑스의 19살 처녀 영웅의 슬픈 최후였다.
교황청은 1456년 7월 7일 명예회복재판을 열어 잔 다르크가 무죄임을 밝혔고,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잔 다르크를 성녀로 시성했다. 그해부터 프랑스에서는 매년 5월의 2번 째 주 일요일에 잔 다르크를 기리는 축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녀가 받았다는 신의 계시에 대해 “일종의 간질증세로 인한 착시현상”이라고 하는 현대의학자들의 분석도 있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신의 축복과 사랑이 잔 다르크를 통해 나타난 것으로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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