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이제 완전히 물러갔나 봅니다. 처서 백로가 지나가고 추분을 앞둔 지금은 그저 많은 것들이 온전한 듯합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알맞고 햇빛이 알맞고 바람도 적당합니다. 올여름도 이렇다 할 태풍 한번 없었지요? 여름 들면서 슈퍼태풍이 올 확률이 높다고 기상예보가 나와서 적잖이 걱정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태풍은 중국 쪽이나 대한해협으로 가는 것이 많았고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것은 없었습니다. 대신 비가 오지 않아서 장마도 마른장마였습니다. 가을장마 또한 오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고추와 깨는 풍작을 이뤘고 논의 나락도 농약을 거의 치지 않았다더군요.

여름농사는 뭐니 뭐니 해도 고추가 큰 농사인데 해마다 탄저병으로 힘들어하는 농민들이 늘어나 고추의 재배면적이 조금씩 줄어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올해는 그 몹쓸 탄저병이 오지 않아서 고추가 풍작이랍니다. 이런 해에 고추를 심어야 되는데 병 무서워서 저는 심지 않았습니다. 뭐든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이 세상 못 사는 사람도 없겠고 안 되는 일도 없겠지요. 대신 깨는 좀 나수 심었는데 그 깨가 지금 한참 아주 노오랗게 익어가는 중입니다. 볼 때마다 옹골진 마음이 생겨서 자주 깨밭을 둘러봅니다.
그런데 그놈의 고라니들, 좋은 풀밭 놔두고 왜 하필 깨밭 속에 들어가 노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쓰러진 깨는 또 비둘기가 올라타서 쪼아 먹고요. 새벽에 깨밭에서 자고 나가는 고라니 어미와 새끼를 두 번이나 보았습니다. 그래도 그냥 속상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조금 더 심을 걸 하는 생각만 듭니다. 힘이 들어서 밭을 두어 마지기 가량 묵혀두었는데 그게 바로 깨밭 옆이라 풀이 키만큼 자랐습니다. 노랗게 익어가는 깨를 보면서 힘들어도 밭을 묵히지 않고 깨를 심을 걸 하는 후회가 자꾸 생깁니다. 그 풀밭 때문에 고라니가 더 오는 듯해서 이틀에 걸쳐 풀을 베어냈습니다.

갈아엎어서 썩힌 다음 마늘을 심어야 하니까요. 한낮에도 별로 더운 줄을 모르겠더군요. 모자만 쓰면 햇볕이 따갑지 않아서 오히려 선선합니다. 풀밭으로 있을 땐 조금 걱정스럽고 보기 싫더니 파랗게 깎아 놓으니 참 개운하고 좋습니다. 묵밭을 보면서 기분 좋다니 제가 조금 이상하지요? 오래전에 썼던 시 한편 옮겨 보렵니다. ‘다시들판에서서’라는 시입니다.

햇살이
가을햇살이 좋아
밭 가운데 서 보면
지난여름 무엇을 했느냐
내게는 묻지 않고
혹독한 시련 견디어 낸
수수모감지 숙여 겸손케 하는,

바람이 좋아
훠어이 - 훠어이 -
지친 내 마음도 함께
고개 들고 손사래 쳐 쫓으면
이마의 땀 씻어주고
등 다독여 주는 바람이 좋아
흐르는 바람이
너무도 좋아


적어 놓고 보니 사실 유치합니다. 이 시를 쓸 무렵엔 밭을 묵혀두는 일이란 생각할 수도 없어서 되던 안 되던 곡식으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서 이 시가 생각났어요. 지난  여름 부지런히 살고 안 살고를 떠나서 지금 이 자리 내려쬐는 햇빛과 바람이 좋아서 더욱이요. 그러나 왠지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시어들이 조금 유치합니다.

그제는 배추모종을 옮겼습니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옳다구나, 물 한번 덜 줄 생각으로 모종을 옮겼습니다. 예전에 쓰던 포트 대신 구멍이 조금 작은 것을 썼더니 배추모종이 잘 자라지 않고 노랗더라고요. 그래서 깻묵우린 물로 액비를 만들어서 서너 차례 주었는데 아무래도 밭에 옮겨야 할 나이가 된 듯하더군요. 그런데 비가 아주 조금오고 말았습니다. 오후에 심고 그 이튿날 오전에 5cm깊이로나 땅이 적시게 비가 왔습니다. 그러면 하루나 버틸 수 있는 양이지요.

그날 밤에 또 다행으로 그만큼이나 소나기가 내려서 배추 심어놓고 지금 사흘째 물을 주지 않았는데 적은양이라도 그게 글쎄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이라 그새 배추가 조금자란 느낌이 드는 것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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