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농사는 뭐니 뭐니 해도 고추가 큰 농사인데 해마다 탄저병으로 힘들어하는 농민들이 늘어나 고추의 재배면적이 조금씩 줄어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올해는 그 몹쓸 탄저병이 오지 않아서 고추가 풍작이랍니다. 이런 해에 고추를 심어야 되는데 병 무서워서 저는 심지 않았습니다. 뭐든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이 세상 못 사는 사람도 없겠고 안 되는 일도 없겠지요. 대신 깨는 좀 나수 심었는데 그 깨가 지금 한참 아주 노오랗게 익어가는 중입니다. 볼 때마다 옹골진 마음이 생겨서 자주 깨밭을 둘러봅니다.
그런데 그놈의 고라니들, 좋은 풀밭 놔두고 왜 하필 깨밭 속에 들어가 노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쓰러진 깨는 또 비둘기가 올라타서 쪼아 먹고요. 새벽에 깨밭에서 자고 나가는 고라니 어미와 새끼를 두 번이나 보았습니다. 그래도 그냥 속상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조금 더 심을 걸 하는 생각만 듭니다. 힘이 들어서 밭을 두어 마지기 가량 묵혀두었는데 그게 바로 깨밭 옆이라 풀이 키만큼 자랐습니다. 노랗게 익어가는 깨를 보면서 힘들어도 밭을 묵히지 않고 깨를 심을 걸 하는 후회가 자꾸 생깁니다. 그 풀밭 때문에 고라니가 더 오는 듯해서 이틀에 걸쳐 풀을 베어냈습니다.
갈아엎어서 썩힌 다음 마늘을 심어야 하니까요. 한낮에도 별로 더운 줄을 모르겠더군요. 모자만 쓰면 햇볕이 따갑지 않아서 오히려 선선합니다. 풀밭으로 있을 땐 조금 걱정스럽고 보기 싫더니 파랗게 깎아 놓으니 참 개운하고 좋습니다. 묵밭을 보면서 기분 좋다니 제가 조금 이상하지요? 오래전에 썼던 시 한편 옮겨 보렵니다. ‘다시들판에서서’라는 시입니다.
햇살이
가을햇살이 좋아
밭 가운데 서 보면
지난여름 무엇을 했느냐
내게는 묻지 않고
혹독한 시련 견디어 낸
수수모감지 숙여 겸손케 하는,
바람이 좋아
훠어이 - 훠어이 -
지친 내 마음도 함께
고개 들고 손사래 쳐 쫓으면
이마의 땀 씻어주고
등 다독여 주는 바람이 좋아
흐르는 바람이
너무도 좋아
적어 놓고 보니 사실 유치합니다. 이 시를 쓸 무렵엔 밭을 묵혀두는 일이란 생각할 수도 없어서 되던 안 되던 곡식으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서 이 시가 생각났어요. 지난 여름 부지런히 살고 안 살고를 떠나서 지금 이 자리 내려쬐는 햇빛과 바람이 좋아서 더욱이요. 그러나 왠지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시어들이 조금 유치합니다.
그제는 배추모종을 옮겼습니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옳다구나, 물 한번 덜 줄 생각으로 모종을 옮겼습니다. 예전에 쓰던 포트 대신 구멍이 조금 작은 것을 썼더니 배추모종이 잘 자라지 않고 노랗더라고요. 그래서 깻묵우린 물로 액비를 만들어서 서너 차례 주었는데 아무래도 밭에 옮겨야 할 나이가 된 듯하더군요. 그런데 비가 아주 조금오고 말았습니다. 오후에 심고 그 이튿날 오전에 5cm깊이로나 땅이 적시게 비가 왔습니다. 그러면 하루나 버틸 수 있는 양이지요.
그날 밤에 또 다행으로 그만큼이나 소나기가 내려서 배추 심어놓고 지금 사흘째 물을 주지 않았는데 적은양이라도 그게 글쎄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이라 그새 배추가 조금자란 느낌이 드는 것 있지요?
박형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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