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가장 빨리 가는 달을 꼽으려면 그것은 팔월이고 그중에서 또 가장 빨리 가는 주를 꼽으라면 그것은 추석 전전주쯤 되지 않을까요? 요즈음은 정말 한 주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서 지나갔는지 조차 모르겠습니다. 추석이 무언 별거라고 할일이 이리 많은지 원! 하지만 바쁘게 보낸 덕분에 이제 논둑 밭둑 풀 베어서 말끔해졌고 깨까지 베어서 큰일은 한풀 꺾인 듯합니다.

깨는 안식구와 함께 꼬박 사흘을 베었습니다. 전체가 노랗게 익어서 깨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지라 낫을 들이대었습니다. 박한 땅에 심은 것은 키가 작아서 베어서 작은 단으로만 묶어 땅에 뉘여 말리고 나머지는 세 다발씩 큰 단으로 묶어 세워 말립니다. 깨도 베어보니 낫질 중에서 힘든 게 깨 베는 낫질인 듯합니다. 하나씩 뙤는 깨가 있어 그것을 땅에 쏟지 않으려고 여간 조심스럽게 낫질을 해야 하는데 이게 차라리 힘으로만 썩썩 풀을 베는 것하고는 다르군요. 낫도 늘 번쩍번쩍 날을 세워서 써야 되고 앉아서는 할 수 없는 것이라 허리는 구부린 채 지탱해야 합니다. 이러니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야말로 이마에 진득한 땀이 배어나옵니다.

베어서 포장위에 들어다 놓으면 안식구는 앉아서 작은 단으로, 그리고 세 개씩 모아 큰 단으로 묶어 놓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걸 다시 리어카에 들어 옮겨서 하우스 안으로 가져다 세우고 다시 낫 들고 깨를 베어다 줍니다. 안식구의 속도에 맞추느라 저는 한숨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일을 빨리 끝낼 욕심으로 묶은 깨 단이 쌓여 있거나 묶을 깨가 동나지 않게 사뭇 뜀박질 하다시피 했지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을 이렇게 하는 게 아닌데, 아닌데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일 힘들어서 난생 처음 밭도 묵혀놨는데 깨 베느라 이렇게 죽을 똥 살 똥 할게 뭐람. 아내더러 잠시 쉬자 합니다.

나무그늘 속은 참 마침맞게 서늘해서 들어서기만 하면 금세 땀이 가십니다. 저희 집 대문 깨에는 문 대신 그늘 짙은 나무가 한 그루 있어 언제부터인지 거기에 기대어 쉬는 게 조그만 낙이 되었습니다. 그 나무는 전남 쪽에서 자라는 멀구슬이라는 나무인데 누님 묘지 주변에 있던 것을 한그루 옮겨온 것입니다.

6월에 보라색으로 피는 꽃이 향기가 높고 잎은 갈수록 무성해져서 그 나무 주변이 한 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아내 몰래 나무에 기대어 담배 한 개비를 피어 뭅니다. 늘 끊었다 붙였다 하는 것이지만 붙이기는 쉬어도 끊을 때는 약간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나무에 기대어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순간들이 좋아서 아내의 성화를 받습니다.

하늘이 파래서 저 뭉게구름이 희게 느껴지는지 아니면 뭉게구름이 하얘서 하늘이 더 파랗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저기 상사화 붉은 꽃들이 피어나고 그 상사를 위로하듯 검은 산제비나비가 꽃술을 어루만집니다. 그런 꽃마저 피워 볼 수 없었던 무화과도 터질 듯 익어서 산새들의 먹이로 제 몸을 내놓습니다. 추석이 바쁘긴 해도 잠시 나무 그늘에 몸을 기대면 추석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띕니다.

토요일 일요일인지라 사람들이 저희 집 앞을 지나서 자꾸 산으로 갑니다. 거기엔 그들의 자궁이 아직 달의 모습으로 남아 있어서 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추석을 한 주 앞둔 때라 벌초와 성묘들을 끝내야겠지요. 저도 지난주에 조카들과 함께 벌초를 끝냈습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조카들을 여럿 데리고 갔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가 멀지 않은 산에 계신데 제 조카들을 아주 어렸을 적부터 데리고 다니곤 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지요. 증조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한다고 아버지가 파 헤쳤더랍니다. 그런데 괭이로 흙을 한번 파헤치자 송슬송슬한 희디흰 것이 밥솥의 김처럼 솟구쳐서 그만 놀라 고꾸라지듯 두루마기 자락으로 끌어 덮었답니다. 그리고는 여태껏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깐 무슨 명당인지는 몰라도 명당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풀도 없는 묘에 벌초를 가면 벌초대신 아래로 쓸려 내린 흙을 봉분께로 끌어 올리는 것이 벌초이며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어린조카들의 귀에 박혔습니다.

어느 해에는 타임캡슐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한 얘들이 저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 하나씩을 모아 가져갔답니다. 그것을 모아서 비닐봉지에 겹겹 싸고 또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서는 바위아래 땅을 파고 묻었는데 그게 글쎄 33년이나 됐다는군요. 그것을 올해는 파보자하여 조카들을 더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직장일로 빠진 애들이 있어서 파보는 것을 미뤄뒀습니다. 미뤄둘수록 빛이 나는 것들, 그리고 그 순간들,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이야기는 이어져야 하는 것인데 세 시간 넘게 산을 타 넘어가 벌초를 하려니 몸이 예전과는 정말 달리 말을 잘 듣지 않더군요. 그래 나도 언젠간 땅에 묻혀 이야기가 되겠거니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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