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한 번에 가을이 완연합니다. 추석이 지나고도 날이 가문 탓에 한동안은 여름처럼 느껴지더니 이제 한낮에도 햇볕의 따가움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침저녁과 한낮의 기온차도 그리 크지 않고 대략 20도 안팎이라 일하기 알맞습니다. TV에선 거의 날마다 단풍에 관련된 뉴스를 보는데 저희 집 뒷산도 봉우리 근처엔 단풍이 들었습니다. 약간의 바람을 동반한 비가 한번 훑고 지나가자 숲이 갑자기 성근 느낌이 듭니다. 바람이 빗방울들을 가지고 나뭇잎들을 한 번씩 두들길 때마다 그새 누우렇게 변한 잎들이 떨어져서 우우 몰려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눈에 확 띠는 붉은색 나뭇잎보다는 키 작은 나무들의 연하게 은은한 붉어짐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필경 사람도 저와 같을 것이지요.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은 바쁘게 흘러갑니다. 달력에 표시해 둔 날들을 보니 일주일 단위로 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군요. 그중 예식장까지 가줘야 되는 결혼식이 두 군데, 문중 시제가 큰일입니다. 마늘심고 고구마 캐고 들깨 베고 나락 베는 일도 큰일이고 그 중간 중간에 자질구레한 일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시월이니까 바쁠 수밖에 없군요. 비가 오지 않아서 마늘을 심지 못하다가 이번 비에 심었습니다. 난지형 마늘은 추석 전후로 심는 것이라 늦지는 않은 것입니다만 일찍 심은 사람들은 물을 주어서 벌써 싹이 파랗게 났습니다. 물줄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마른땅에 심어 놔 봐야 곯기나 할뿐 싹이 나지는 않는 거라 어차피 비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녹두도 땄습니다. 참 보잘 것 없던(!) 그것에서 보기와는 달리 알곡은 실하게 많이 나왔습니다. 운두가 높은 커다란 그릇에 녹두를 따다 붓고 햇빛에 말리면서 발로 자근자근 밟으면 톡톡거리며 꼬투리가 벌어져 밑바닥에는 배추 색으로 진한 녹두가 쌓입니다. 그 알곡을 모아서는 바람에 날리고 키로 까불어서 정선을 하면 그렇게 옹골질 수가 없더군요. 저는 옛날부터 고소한 녹두밥을 참 좋아했습니다. 특히 녹두로 쑨 미음을 좋아했지요.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습니다. 막둥이로 늦게 태어난 탓도 있겠지만 횟배를 자주 앓았습니다. 한번 앓아누우면 일주일가량씩이나 무얼 먹지 못하고 배를 깔고 누워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안타까워서 녹두미음을 쑤어주시곤 했지요. 그건 참 고소하고 속이 편했습니다. 귀찮게 씹을 필요도 없이 훌훌 들이마시면 되는데 특히 식어서 윗부분이 굳은 것을 손으로 집어 올려 먹기를 좋아했어요. 지금은 잔병치레 따윈 모르고 지내도 그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녹두미음을 먹어보고 싶습니다.

멧돼지 지킨다고 밖에서 자는 것도 이제는 추워서 어려운지라 고구마도 조금 일찍 캤습니다. 여름내 물을 얻어먹지 못한 것이라 순도 별로 뻗지를 못했는데 이번 비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해갈을 하라고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놔뒀더랬습니다. 그러나 불안해서 안 되겠더라고요. 추워서 밖에서는 잘 수 없고, 방에서 자다가 일어나 밤에 한 두 번씩 밭을 둘러보는 것도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름내 지킨 보람도 없이 한 순간에 멧돼지에게 당할 걸 생각하니 조금 바쁘긴 해도 캐버려야겠더군요. 그래 예초기로 순을 쳐내기 전에 나물해 먹으려고 순 한주먹 뜯어 놓고 예초기질을 했습니다.

캐는 건 경운기로 했지요. 쟁기를 깊이 넣고 액셀레버를 한껏 올려서 먼저 한 두둑을 갈아 놨습니다. 흙 밖으로 얼굴을 내민 고구마가 매끈매끈하니 좋았습니다. 밑이 전체적으로 작기는 해도 가문 탓에 고구마는 아주 쇳소리 나게 탱글탱글했습니다. 흙 속에 묻힌 것들을 파내서 무더기무더기 모아놓고 또 한 두둑을 갈고, 그렇게 세 두둑을 다 캐서 토방 밑 햇빛 잘 드는 곳에 검정 포장을 펴고 가져다 부어놓으니 한 나절이 걸렸습니다.

요즘 밤에는 곶감을 깎는 게 일입니다. 추석에도 먹지 못하겠던 감들이 이제는 저마다 빨갛게 낯이 나서 퍼렇던 나무가 비로소 감나무인 듯합니다. 새가 쪼은 것들은 홍시가 되어 땅에 떨어지는 까닭에 줍다가 보니 벌써 곶감을 깎아야겠더군요. 이건 때를 놓치면 감의 봉지가 무르고, 그 무른 것을 깎으면 홍시가 되기는 쉬워도 곶감은 되기 어려운거라 곶감은 때가 있습니다. 다른 감은 몰라도 이곳에 많은, 속 일부가 까만 먹감은 그렇습니다.

바구니 세 개에 가득 감을 따다놓고 아내와 함께 곶감을 깎았습니다. TV는 켜 놓은 채 귀로 건성건성 듣다가 어쩌다 한번 눈길을 주면서 정신은 칼을 잡은 손끝에 모읍니다. 한 바구니가 대략 한 접 100개정도이니 하룻밤에 두 바구니만 깎아도 밥값은 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줄어드는데 재미가 붙어서 세 바구니 째입니다. 8시 무렵부터 깎기 시작한 게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다른 곳은 다 괜찮은데 허리가 아프더군요.

하지만 저게 한 사나흘만 잘 마르게 되면 말랑말랑해져서 오며가며 하나씩 집어먹기 좋게 될 겁니다. 곶감이 깎기는 지질병 나도 말라가면서 하나씩 집어먹기 시작하면 금세 없어지는 헤픈 것이라 가능하면 많이 깎으려하는데 글쎄 뜻대로 될는지요. 중요한 것은 날씨에 달려 있는데 잘 말려서 집에 온 얘들이 하나씩 달게 먹는 흐뭇한 광경을 어서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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