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절기 막바지에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추위라고 해봤자 평소보다 기온이 5~6도 더 낮을 뿐, 영하로 곤두박질쳐서 얼음이 얼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갑자기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든 듯 윤기 있던 것들은 버썩하니 마르고 가벼워진 느낌이 듭니다. 늦가을의 추위라는 건 늘 을씨년스런 비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라서 이번에도 비를 동반했습니다. 다른 때도 마찬가지지만 이번 비는 참 고마운 약비입니다. 내남없이 양파를 심어놓고 비가 왔으니 애써 물 줄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보리 종자들도 물론 파아랗게 싹이 올라왔고요.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가뭄에 보리를 심으면 보리는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을 날 가물면 일에 조금 여유가 생기기도 합니다. 보리심기가 늦어져서 가을 일 서두는 것인데 그럴 일이 없으니까요. 다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올해는 입동이 11월 8일에 들었고 “입동 전에만 묻어 달라”는 게 보리인지라 날씨가 들쭉날쭉 하지만 않는다면, 옛날 같으면 지금이 얼마나 바쁜 철인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보리조차 근년에는 심는 사람이 드뭅니다. 정부의 보리수매가 없어지면서 팔아먹을 길 막힌 보리는 이제 대부분 사료용으로 심을 뿐입니다.

보리이야기를 하니까 자꾸 옛날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식량증산이 나라의 중요한 시책이었을 때는 밭에는 물론 논에도 적극 보리심을 것을 권장하고 독려하였는데 어느 핸가 가을가뭄이 심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농민들이 하나같이 차일피일 비 오기만 기다리며 보리파종을 미루었지요. 그리고는 다른 일은 다 끝냈으므로 단풍놀이들을 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농사일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봄에 한 참 벚꽃 필 때 꼭 못자리와 겹치므로 꽃구경 가지 못하고 가을 단풍 좋을 때는 추수가 겹쳐서 단풍놀이 못가는 것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마을이 날 잡아서 어디 놀러 간다 할 때는 대절관광차가 필요합니다. 그 관광차 불러 타고 평소 가지 못하던 단풍놀이를 가니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공무원들이 나서서 보리 심지 않은 마을은 놀러 못 간다고 관광차를 취소하라는 둥 압력이 대단했었습니다. 지나놓고 보니까 참 웃음이 나옵니다. 지금 같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요? 이야기가 잠깐 겁도 없이(!) 다른 데로 갑니다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등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도 시간이 지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지 않을 런지요. 어쨌거나 지금은 제 보리밭의 연두색 어린 싹들의 보리가 겨울의 문턱에서 더 어여쁘게만 보이는군요.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인지 감나무 이파리는 아직 시퍼렇게 성성한데 감은 아주 새빨갛습니다. 익을 대로 익은 듯 새가 쪼지 않았어도 이가지 저가지에 홍시가 계속 생겨납니다. 그 홍시를 따서 마루에 가져다 놓으면 오래전의 것도 곯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이제 약이 찰만큼 찬 모양입니다. 이러면 감식초를 담글 때가 되었습니다. 감식초도 잘 익은 홍시로 담아야 탈 붙지 않고 색깔 좋고 신맛 강한 식초가 됩니다. 감식초 담을 때가 되면 저는 하루 한번 간짓대와 바구니를 들고 감나무 밑을 돌아옵니다. 높은데 매달린 홍시는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려서 줍고 낮은데 것은 간짓대로 따서 하루에 거의 한 바구니씩 감식초 통에 가져다 붓습니다.

나중에는 그러니까 따놓은 감들이 홍시가 되는 겨울에도 며칠에 한 번씩은 골라 식초통에 담가둡니다. 생감으로 팔아먹을 수 있을 만큼 감나무가 많은 게 아니어서 보관하기도 어중간합니다. 하지만 식초로 만들어 둘 수 있는 덕분에 처치가 곤란하지 않고요, 감식초는 또 나중에 좋은 물물교환거리가 되거나 선물용이 되곤 합니다. 이제 저희 집일은 감 따고 콩 거두고 한지형(6쪽) 마늘 한 두둑 더 심는 일이 남았습니다.

콩 이야기 조금 하고 싶군요. 여름내 그렇게 콩밭에 땀을 쏟았는데 콩은 영 신통찮습니다. 늦게 심은 것처럼 이파리가 아직 시퍼레서 낙엽 하나 지지 않고 있습니다. 꼬투리라도 실하면 좋겠는데 위의 삼분의 일은 쭉정이고 밑에 것은 하나씩 뙤는 것도 있습니다. 남들은 이미 다 거두어서 타작을 마친 사람도 많은데 아직 밭에서 저 지경이니 콩밭이 보기 싫군요. 늦게 심어서일까요? 6월 20일 무렵에 심었기에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제사는 이곳은 밭의 서쪽으로 산이 바짝 붙어 있어서 햇빛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콩 저것이 걱정입니다. 꼬투리가 퍼런 것은 이제 영글기는 틀렸고 군데군데 이파리가 떨어지는 것은 빈쌈지가 많으니 타작한들 실한 것이 얼마나 될까 의문입니다. 언젠가 한해도 콩이 저 모양이어서 예초기로 베어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씩 영근 콩알이 예초기 날에 맞고 뛰어 나와서는 땅에 하얗게 깔리는데 그것참 주워 모을 수도 없고 내버려둘 수도 없고 심정이 지랄 같았습니다. 그래도 놔두는데 까지 놔둬볼 생각입니다.

마늘을 11월 중순 무렵이나 심어야겠습니다. 그동안에 종자를 까놓고 땅이나 잘 다듬어 놓았다가 한 두둑 이니까 심심풀이 삼아 심어보지요. 일이 조금 한가해지니 추위 닥치는 것과는 아랑곳없이 느긋합니다. 감도 가능하면 날마다 조금씩 따 내려고 생각합니다. 감나무 아래서 소풍 하듯이. 날은 추워도 하늘이 맑고 햇빛이 밝아서 마루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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