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잦습니다. 이번 비는 몹시 거칠어서 집 주변이 어수선하기 짝이 없습니다. 새벽에 처음 시작할 땐 얌전한듯하더니 아침을 먹을 무렵부터는 거세게 들이쳐서 마루와 방문까지 젖었습니다. 밥상도 겨우 방안에 들여 놨으니까요. 비바람이 한 번씩 욱대기질 하듯 몰아치면 여기저기서 무엇이 굴러다니고 펄럭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평소에 잘 단속해놔도 난리입니다. 여름에 오는 태풍하고는 다른 거라 금방 수그러들기는 하겠지만 비 오고 바람 불면 양옥집과는 달리 저희 같은 흙집은 한쪽 면은 꼭 비에 젖어서 불편합니다.

어제는 마늘을 심었습니다. 추석 지나고 한 두둑 심은 것은 제가 해마다 심어왔던 난지형 마늘이고 어제 심은 것은 한지형 육쪽마늘입니다. 한지형은 예전에는 김장배추 뽑아내고 심기도 했는데 때가 됐는지 마늘쪽을 내면서 보니 벌써 뿌리가 나오기 시작했더군요. 그렇다면 심을 때가 지나간다는 신호입니다. 하긴 저번 비 오기 전에 심은 형님 댁의 마늘은 비를 맞고 싹이 다 났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지금 심어도 그리 늦지는 않을 듯합니다.

거름뿌리고 갈아놓은 밭이라 비온 지 일주일 가까이 지났어도 다시 경운기질을 하려니 땅이 많이 질었습니다. 신발이나 바퀴에 흙이 달라붙지는 않지만 한 2~3일 더 놔두었다 했더라면 보슬보슬하니 좋을 뻔 했습니다. 저번처럼 아내와 함께 비닐을 씌웠습니다. 먼저 심은 마늘 두둑 옆에 다시 한 두둑을 만드는 것이라 저번 골대로만 따라가면 반듯하게 비닐이 씌워지는 겁니다. 제가 마무리 삽질을 하는 동안 안식구는 어느새 마늘종자 까놓은 것을 가져다가 한쪽 머리에서부터 심기 시작하는군요. 뿌리가 나오는 마늘을 보며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땅이 무른 탓에 마늘심기는 참 수월했습니다. 노타리를 하지 않았어도 슬슬 갈고 발자국도 남지 않게 두둑 가장자리에 서서 쇠스랑으로 고른 것이라 마늘쪽이 구멍에 쏙쏙 들어가 묻힙니다. 육쪽마늘은 또 쪽이 크고 길쭉해서 손에 잘 잡히고 땅에 잘 박힙니다. 아내와 제가 마늘두둑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앉아서 경쟁하듯 심어가니 한 오십미터쯤 되게 기다란 두둑이 금세 끝이 났습니다. 마늘종자는 저에게는 없어서 이집 저집에서 바꾸거나 얻어온 것인데 제가 워낙 계산을 잘 맞추어서(!) 다 심고 나니 자잘한 것 한 움큼이나 남을 만큼 알맞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이렇게 비가 오는 것입니다. 가을일이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드니 비 오기 전에 일 끝낸 것이 아쉬울지언정 대견하거나 옹골지지는 않는군요. 오뉴월 화톳불도 쬐고 나면 섭섭다더니 그 짝인 모양입니다. 힘들었던 일들도 지나고나니 힘들었다는 생각이 전혀 없고 오직 세월이 또 이렇게 흘러가 버렸구나 하는 마음만 앞선 달까요, 가을비 탓인지는 몰라도 올 한해를 돌아보는 마음에 특별하게 무엇이 기뻤다거나 나빴던 감정도 없이 그저 덤덤한 생각이 드는군요. 어제까지만 해도 감나무에 이파리들이 새파랗게 많았는데 비바람이 몰아친 잠깐 사이에 거짓말 같게도 남김없이 다 떨어져버리고 감만 빨갛게 달려있습니다. 가을엔 이런 변화의 모습이 때때로 낯설고 당황스러워 가끔 우울하고 쓸쓸 합니다.

예상했던 대로 오후 들어서는 바람이 불지 않고 그칠 듯 말 듯 우중충한 하늘에서 비는 종일 멎지 않는군요. 이런 날은 술이 한잔 제격이겠는데 추석이후로 술을 조금 멀리했더니 이제는 입에 대기 걱정스럽습니다. 술도 말이지요. 오랫동안 먹지 않다가 다시 먹으려면 처음엔 아주 고급한술로 시작해야합니다. 안주도 그렇지요 적어도 생선회 정도는 있어야 되고 술은 임금시절로 말한다면 진상주 정도는 되어야지요. 그 정도가 눈앞에 갖춰져 있으면 먼저 안주 핑계대고 술 한 잔 먹고 술 핑계대고 안주 한 점 집은 뒤에 다시 술 한 잔 식으로 적시듯이 천천하게 서너 잔만 먹는 겁니다. 저급한 술은 몹시 기분 나쁘게 취한답니다.

그러니 술 생각을 접어버리고 하루 종일 방안에 박혀서 앉았다 일어났다 가끔씩 TV를 켜기도 하고 책상 근처에 흩어져있는 책들만 들었다 놨다합니다. 오늘 하루 지내는 걸로 봐서 다가올 겨울이 걱정입니다. 저는 유독 햇빛을 쬐지 않으면 우울한 심사가 발동해서 사람이 달라지다시피 하거든요. 그러니 몸 꿈지럭거릴 수 있었던 어제가 사실 행복했던 것이고 어제보다는 그제가 그제보다는 지난 가을과 여름이 더욱 좋았다 생각이 듭니다. 불과 일이년 사이에, 제 몸과 생각의 변화가 이렇게 많이 달라질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런 줄을 미리 알았든지 제 아내는 지금, 까막까막 합니다만 5년인가 6년째 취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 그것에 마음이 쏠렸는지 해금을 손에 잡더니 일주일에 한번, 두 시간씩 읍에 나가서 배웁니다. 일 바쁠 때는 제가 구박도 하였는데 개의치 않고 굳세게 나가서 지금은 실력이 늘어 발표회도하고 연주봉사도 나가는 모양입니다. 그런 것이 부러운 생각은 꼬물도 없습니다만 그것이 삶의 활력을 가져올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봐야겠지요. 예전에는 나이자신 분들의 취미활동이 시간과 여유 많은 도시 분들의 이야기이지 언감생심 농촌의 분들이야 어렵지 싶었고 그것이 곱잖게 봐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방 여러 면에서 생각해보면 저 같은 사람은 용기가 없고 지나치게 아상에 사로잡혀서 그리 못한다고 봐야겠습니다. 음식으로 비교한다면 죽자 사자 일 년 내 한 가지 밥과 찬만 먹으려는 사람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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