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씨가 일주일을 넘기고 열흘을 넘겨서까지 비가 지짐거리고 흐리기만 하니 좋지 않은 일이 많이 생깁니다. 양파가 웃자라고 뿌리에 고자리가 생기는 게 그것이고요. 밭둑의 풀도 여름 못지않게 커버렸습니다. 딴 해 같으면 쌀쌀해지는 날씨 덕에 벌레나 나방이 죽어 없어지고 땅속으로 들어가는데 그것들도 버젓이 살아서 활개 칩니다. 그리고 또 무얼 말릴 수가 없습니다. 집집마다 곶감 깎아 매달아 놓은 것들이 모두 곰팡이가 나고 물러 처지니 파리 응애 따위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습니다.

감이 풍년인 덕에 감 값이 작년의 절반으로 떨어져서 따는 품삯이 나오지 않는다고 커다란 대봉감이 지금도 나무에 그대로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것은 감나무에서 홍시가 되면 땅에 떨어져 물크러지지요. 버리는 겁니다. 차마 아까워 손닿는 곳에 있는 것들을 따서 곶감들을 깎았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 겁니다. 저도 철물점에서 곶감 매다는 클립을 사오려다가 그걸 보고 그냥 감나무에 놔두었습니다. 대신 하루가 멀다 하고 홍시를 따다 식초 항아리에 쏟아 붓는데 그 감나무에 달린 홍시조차 터지고 물크러져서 식초가 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감 중에서 단감만이 제대로입니다. 늦게까지 이파리가 퍼렇더니 씨알이 굵고 잘 익어서 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열기도 많이 열었고요. 밭둑에 30년 넘은 감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올해는 양이 많아서 하루에 한 나무씩 시차를 두고 이틀을 땄습니다. 그래서 처음 딴 것은 모두 택배로 보내줄데 보내주고 두 번째 딴 것은 여기저기서 사자는 주문이 와서 파는 중입니다. 해마다 그러는 것이지만 올해도 감을 다 줘버린 나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비로소 짐을 덜어버린 훌훌한 느낌을 제가 받으면서 오랫동안 나무를 쳐다보았습니다.

비가 여러 날 지짐거려 땅이 물러서인지 요즈음은 다시 멧돼지에게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외출하면서 잠깐, 밭 귀퉁이가 파 헤쳐진 흔적이 있는 듯해서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멧돼지였습니다. 첫 날은 그렇게 보리밭 한 귀퉁이에서 간만 보고 가더니 이튿날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심겨진 더덕 밭을 갈기 시작하더군요. 더덕은 여태껏 한 번도 피해를 보지 않아서 멧돼지가 더덕은 손대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사흘째도 더덕 밭에 와서는 파헤친 곳은 잔뿌리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웠습니다.

나흘째인 오늘은 화단을 여러 군데 파헤쳐놨습니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을 것 같은 길까지 한 없이 파헤친걸 보면 이놈들도 땅을 파 헤치는 게 연습이거나 취미활동이지 싶습니다. 파헤친 모양새를 자세히 살펴보면 먹이를 찾아먹은 것과는 많이 다르니까요. 마치 쟁기보습의 하나인 볏에 의해 일정한 속도로 땅이 갈려서 한쪽으로 넘겨지듯 흙은 속도감 있게 파헤쳐지고 쭈욱 이어지는데 발자국에도 힘이 일정하게 들어가 있는 게 살펴지니까요.

그건 그대로 놔두고 아내와 저는 하루 종일 감을 땄습니다. 그대로 놔두면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홍시가 될 것 같습니다. 저렇게 많은 것을 다 식초 담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또 그것을 담글 그릇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 따고 보는 건데 아무 마련 없이 감을 따서 땅바닥에 모아 놓으려니 참 거시기합니다. 뭐든지 풍년이 들면 흔해빠져서 없는 사람도 귀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누구를 주자고 썩 나서기도 그렇습니다.

어쨌거나 따는 이 행위는 즐겁습니다. 저는 한발이나 차이가 나게 길고 짧은 대나무 전지개 두 개를 들고 나무에 올라가고 아내는 밑에서 제가 따 주는 감을 받았습니다.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은 따서 던져주면 밑에서 받는데 남자들이 공 받는 것과는 달리 아내는 받는 모양새가 영 불안합니다. 제가 잘 가늠하지 않고 던지면 못 받기도 하니까 꼭 손에 닿게 던져줘야 합니다. 문제는 홍시입니다. 생감도 3~4일후면 홍시가 될 것이므로 따기 좋고 운반하기 수월한 생감만 따야 되는데 속이 다 보일 듯 한 맑은 홍시를 보면 버려두기가 아까워서 따게 되지요.

이걸 밑에 있는 사람에게 던지면...짐작이 되나요? 떨어지는 속도에 완충작용이 되게 손을 뒤로 슬쩍 물러내며 받아야 되는데 손에 닿는 지점에서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받으니 홍시가 그만 터져 얼굴에도 튀고 옷도 버리지요. 나중에는 제가 아주 농익은 홍시를 따서 장난하느라 던지기도 했답니다. 그럴 때엔 피하면 되는데 고지식한 우리 사모님은 피할 줄 모르고 벼락을 맞으니 감나무 위의 저는 감 따는 게 참 재미있지요.

그렇긴 해도 감나무 위의 작업은 아슬아슬합니다. 나무가 삼십 년 이상 자연스럽게 자란 것이라 가지가 높습니다. 그러니 손으로 직접 딸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고 전지개를 써야 되고요, 짧은 것은 손처럼 쓰기 수월하고 빠른데 멀리 있는 것을 따려고 긴 것을 쓰면 따기도 어렵고 발밑도 위태롭게 흔들려서 온 신경이 발끝과 손끝으로 분산되어 쉽게 피로합니다. 또 감나무는 잘 부러지는 탓에 철없는 아이들에게는 감 따는 것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저도 그렇지만 냇가 건너 저희 형님은 나이 칠십이 낼 모래인데 애들을 시키는 법이 없습니다. 그 애들이 다 사십 살이 넘어 장성 했어도 감나무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몸 편찮은 형수님과 같이 며칠을 따는 중입니다. 부모 마음이라는 게 이런 것이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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