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김장을 조금 빨리 했습니다. 초겨울 날이 너무 궂어서 배추들이 속에서 썩는다고 걱정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다 저희가 늘 김장을 하는 12월 초는 바쁜 일이 여러 개 몰려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가만 누워있다 벌떡 일어나 옆에 있는 아내에게 들이대듯 이야기 했습니다. 요즈음이 조금 한가하고 내일 모레 또 날이 추워진다니 우리도 이참에 해버리는 게 어때? 항상 하는 때가 있는지라 웬일인구? 하고 아내가 눈을 끔적이며 옴니암니 생각해보는데 제가 제차 다그치며 이러저러 여차저차 하지 않겠냐고 하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한나절, 저희 집은 비상체제에 들어갔습니다. 밤마다 조금씩 마늘을 까려던 것을 하룻밤 새에 다 까야했으니 밤 열한시를 넘길 수밖에 없었고요, 그리고 큰 파 쪽파 뽑아다 다듬으랴 갓 오려다가 다듬으랴, 생강 캐서 씻는 일, 청각 물에 불리고 이것저것 재료 집어넣고 육수 내는 일, 방앗간에 가서 찹쌀가루 빻아다가 죽 쑤는 일, 고춧가루도 모자라서 고추 꼭대기 따서 빻아 와야 하는 일, 아무리 늦어도 첫날 배추까지 따다가 간 죽여 놔야겠지요? 배추를 다듬는데 저희 집 것은 속이 썩거나 무슨 병이 있는 건 없더군요. 어쩌다 겉잎 한 두 장식 검은 줄기가 생겼거나 진딧물 낀 게 있었을 뿐 포기도 알맞게 크고 노란 속도 참 좋았어요. 아마도 물 한번 주지 않고 보대끼게 하면서 키운 게 이번 궂은 날씨를 이겨내게 하지 않았나 싶더군요.

둘째 날은 아침 일곱 시부터 배추를 씻었습니다. 배추를 씻을 때마다 걱정되는 건 어쩌다 이파리 틈에 낀 고자리나 노린재인데 대야에 담긴 물에다가는 아무리 씻는다고 해도 이놈들이 잘 안 씻겨 나가는 수가 있거든요. 일반농법으로 재배하면 고자리 따위야 걱정 없겠지만 유기농은 이럴 때 조금 껄적지근 합니다. 어느 핸가는 김치에 섞인 노린재를 씹은 기억이 있어서(그 소름끼치는 느낌, 공감 하실랑가요?) 올해는요 배추를 옆에 흐르는 냇물로 끌고 갔습니다.

안식구는 한사코 드나들기 번거롭다고 수돗물 펑펑 틀어놓고 씻자는 것을 나르는 것은 내가 다 할 테니 걱정 말고 씻기만 하라고 제가 우겼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배추 150여포기 씻어내는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으니 그제는 마누라님의 입이 벌어지더군요. 씻어본 분은 알거예요. 콸콸 흐르는 물에는 배추를 물에 넣고 한번 흔들기만 해도 모든 지저분한 것들이 남김없이 씻겨버리잖던가요? 나르는 것도 외발 리어카에 실어 나르니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해마다 이랬으면 제가 노린재를 왜 씹었겠습니까만 올해는 궂은 날 덕분에 냇물이 많이 흐르는군요.

배추 씻어 놓고 아침 먹고 저는 또 차 몰고 방앗간에 가서 양념을 갈아왔습니다. 그 사이에 안식구는 김치 담을 그릇들 다 챙겨서 씻어 엎어 놓았고요. 이래저래 준비가 다 끝났을 땐 아침 열시였습니다. 이제 앉아서 버무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며칠 전에 바다에 가서 주어다 해감을 하고 있는 해삼도 한 마리 건져 소주 한잔에 곁들이니 몸이 나른하게 풀어지며 기분이 좋습니다. 옆에 계시는 형수님도 부르지 않고 딸애만 대리고 식구끼리 버무리니 오히려 느긋하기까지 해서 일을 즐길 마음이 생긴 겁니다.

김치 통이 다 차면 들어내고 새 통으로 바꿔주는 건 제일입니다. 그리고 짬짬이 큰 대야 같은 것은 씻어서 본래 자리로 정리하고요. 이제 마음은 느긋해도 버무리는 일과 뒷정리가 거의 동시에 끝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실 저는 손발이 아직 많이 바쁜 거죠. 그렇게 이틀 한나절 만에 김장이 끝났습니다. 밭에서 뽑지 않은 배추는 많이 남아서 형님 댁에서 가져갔고요. 김치를 담아서는 올해 김장을 하지 않는다는 두 집과 혼자 사는 집 세집에 한통씩 다섯 통을 나눴습니다. 서울의 딸애들과 저희들 먹을 것 충분히 남기고요.

점점 축소되고 변해가는 것 중에 하나가 김장인데 김장만큼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도 없다 생각됩니다. 김치를 익혀두고 겨우내, 이듬해 봄까지 김치하나만 놓고 밥을 먹을 지언정 김치가 빠지면 아무리 다른 반찬이 많아도 밥을 먹은 것 같게 생각지 않는 우리의 식습관이 서로 나누고 함께하는 김장문화를 만들었는데 점점 이런 것도 사라져가지요? 농촌 시골의 노령화와 도시의 아파트라는 주거문화가 김장을 자꾸 어렵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요즈음은 절임배추를 하는 업체나 김치공장들이 성업 중인가 봅니다.

어쨌거나 솥에 물 한 솥 가득 덥혀서 벗어놓은 빨래하고 저는 솥에 남은 물이 아까워 한통 퍼 다가 머리 감고 면도 하고 목욕까지 했답니다. 헌 전기밥통 속은 보통 가정에서 버리지 않고 그릇으로 쓰잖아요? 그 통에 따끈한 물 한통이면 저는 머리 감고 몸을 씻습니다. 미지근하게 찬물을 섞으면 두통 넘게 되므로 그거가지면 머리 감고 대강 몸의 때를 벗길 수 있더라고요. 아내가 등을 밀어주고요. 그렇게 약간 춥게 목욕을 하고 보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얼마나 개운하고 따뜻한지요. 그제야 김장 다 끝난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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