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눈이 왔습니다. 동지를 코앞에 두고서요. 처음엔 함박눈 몇 송이가 그야말로 꽃잎처럼 팔랑거리며 마당에 떨어지더니 우르르 몰아오는 바람과 함께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다가 우박이 변하여 진눈개비로, 또 함박눈으로, 저 하늘위에서 누구신가 엔간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저녁나절 내내 변덕이었습니다. 날이 그다지 춥지는 않아서 그리고 그때껏 비가 내렸던 까닭에 하얀 것은 금세 자취가 없어져서 첫눈이 온 줄을 모르겠더니 밤을 새우고 아침에 방문을 열어젖히자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제까지 가을이더니 오늘 아침 겨울이 된 것입니다. 순백의 단한가지 색으로만 말해야 된다는 듯, 그런데 참 왜 눈은 흰색이어야 하죠? 가령 노랗다거나 붉다거나 연두색이거나 더 좋은 것은 일곱 빛깔 무지개로 색색이 내리면 정말 좋지 않을까요? 아하! 그런 것은 겨울의 색이 아니어서 이미 봄 여름 가을을 거치면서 하나님이 다 보여주신 색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흰색은 겨울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아무것도 없음의 색이지요.

다 제 잘났다고 뽐내던 것을 정신 번쩍 나라고 한동안 깨끗하고 차가운 것으로 감쌌다가 이제 좀 반성하는가 싶으면 슬그머니 녹아들어서 예전의 모습과는 다른 차분한 모습을 드러나게 하지요. 그 아무것도, 허영이 남아 있지 않은 결빙의 색깔이며 계절인 겨울, 그래서 눈이 오는 것이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축복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그동안 배고픈 줄을 잊고 있었다면 한 두 번쯤 배고파 보거나 적어도 그 생각이라도 하라고 눈은 오고, 그동안 추운 것을 생각지 않고 살았다면 다른 추운 사람들을 한번 쳐다보라고 눈은 오고,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새들에게도 그 자유의 소중함을 생각하라고 눈은 와서 저 작은 새들이 자꾸 위험한 인간처로 날아드는 것이겠습니다. 다른 곳에서 먹이를 찾던 것들이 단 며칠이라도 눈이 덮여 있으니까 눈이 빨리 녹는 두엄자리와 집 앞 텃밭으로 옵니다. 그곳에 평소에 그들이 먹던 깨끗하고 좋은 먹이가 있을 턱이 없지만 열심히 먹이를 쪼는 모습에서 잠깐, 우리들 삶의 의미를, 그 미추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겨울엔, 우리들의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속엔, 시래기 된장국 냄새가 나던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의 격정이 곰삭을 대로 삭아 버리고 단지 밑바닥에 착 가라앉아 냄새조차 순할 대로 순해진 된장국은 그 자체로 일 년 내 논밭에서 일한 커다란 소의 눈망울 입니다. 소의 눈망울을 닮은 아랫배 내놓은 어린아이의 배꼽입니다. 바알갛게 손이 언, 머리에 수건 쓴 어머니입니다.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 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늦은 저녁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 속에는 눈 시립도록 아름답게 피어오르는데 동지가 다 되어 찾아 온 첫눈 속에서 우리는 무얼 찾아야 하는 건지 성탄과 연말의 소란스러움만 어지럽군요.

이런 때일수록 이슬람의 라마단처럼 한 사나흘 굶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그도 아니면 숲에 들어가 한 사흘 밤 풀 더미 속에서 자보는 것, 제발 저 시끌벅적한 TV 프로라도 한 사흘만 내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은 끄면 되는데 무슨 소리냐고요? 딴은 그렇습니다. 글을 쓰면서도 저 같은 사람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엉터리없고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답니다.

나무를 했습니다. 일 년 만입니다. 눈 때문입니다. 철새가 지구의 자기장과 태양의 위치를 좌표삼아(맞는 말인가요?) 몇 천 킬로를 날아 이동지에 안착하듯이 저의 DNA에도 눈과 나무는 하나의 등식으로 새겨졌나 봅니다. 그래서 자동으로, 무의식적으로 나무를 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조금 달라졌습니다. 예전엔 더 많은 나무를 해서 쌓아 놓으려 했는데 이제는 전혀 그런 욕심은 생기지 않고 그냥 그 행위 속에서만 저의 존재를 느끼려는 듯 아니면 행위 그 자체가 나인 듯한 다발 두 다발이 전혀 마음 쓰이지 않는군요.

이 변화가 왜 생겼는지 저는 압니다. 얼마 전에 책 한권을 읽었기 때문이지요. 서울의 누님 집을 갔다가 책장에 꽂힌 것을 우연히 보고 뽑아 왔는데 그전에는 사실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농사꾼에게는 지겨운 풀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그러나 단순하게 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람이 풀에 빗대어 하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감옥에서는 그 흔한 풀 한포기 가꾸기도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밖에서는, 특히 농사꾼에게는 정말 지겹기만 한 그것이, 서있는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달리 보인다는 요즈음 드라마의 한 장면을 굳이 빗대지 않더라도 억압당하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다른 의미로 되는.

저는 그 책을 읽으며 야생초가 달리 보였습니다. 적어도 앞으로 풀에 포획되어 살지는 말자 다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풀에 대해서는 그렇게 못 견딜 만큼 보기 싫은 생각이 없어지더군요. 나무 하는 것도 그의 연장선인 듯합니다. 필요하면 아무 때라도 낫을 들고 산에 오르면 되는 것을 꼭 굳이 집 안으로 묶어 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되는가, 아니지요? 그런 마음의 느슨해진 틈에 다른 좋은 생각하나 비집게 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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