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욱  한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수확후이용과장


요즘 차를 타고 들녘을 달리다 보면 논에 벼 대신 콩이나 채소를 재배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벼가 자라는 논으로만 이어진 단조로운 풍경이었다. 이제 논에는 나란히 줄을 선 시설재배용 비닐하우스도 흔하다. 가끔은 파란 양철지붕에 규모가 제법 큰 축사도 논 가운데 우뚝우뚝 솟아있다. 여러 가지 작물과 농업시설이 어우러진 들녘 풍경은 농촌다움을 더해주는 것 같아 보기에 참 좋다.

주식인 쌀을 자급하기 위해 벼 재배에 집중하던 시절이 있었다. 산간 계곡의 작은 땅이라도 물만 댈 수 있으면 계단을 쌓고 논을 만들었다. 쌀을 한 톨이라도 더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에 벼가 자라는 논 위주의 들녘은 단조로운 멋은 있었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농촌스런 느낌은 좀 덜 났던 것 같다. 우리에게 한국적인 농촌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는 2% 부족했던 풍경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아기자기한 텃밭에 채소를 가꾸고, 넓은 논과 밭에는 여름에 벼와 콩을 심고 겨울엔 보리씨앗을 뿌리는 소박한 전통 농업을 일궜다.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그런 농법은 한국적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산과 들이 어우러진 농촌에 여러 가지 작물들이 어울려 정원처럼 가꾸어진 들녘 모습이라야 푸근한 느낌이 든다. 거기서 얻은 귀한 곡식으로 우리의 음식 문화도 일궜다. 콩과 보리를 넣은 밥을 짓고 쌀과 콩이 어우러진 떡을 만들어 먹었다. 보리밥과 인절미 그리고 된장국이 우리의 전통 음식이 된 것이다. 이런 먹거리를 사계절 내내 조화롭게 생산하고 소비해온 것이 이 땅의 전통문화다.

오늘날 전통농업은 생산성이 낮고 경쟁력도 없다는 판단으로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겨울철 들녘이 아무것도 심겨지지 않은 채 황량한 모습으로 버려진 지 오래다. 이런 흐름은 우리 고유의 음식문화에도 영향을 주어 돌이키기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경쟁력 이유만으로 전통농업을 포기하고 음식문화에 상처를 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름다운 농촌 풍경이 사라지고 전통문화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아무리 이해 하려해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전통농업은 곧 문화다. 우리 문화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그 뿌리가 되는 전통농업을 반드시 지켜나가야 한다. 세계화라는 화려한 논리는 우리나라처럼 농업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그저 불안한 유혹이고 감춰진 협박일 수 있다. 이러다가 생존과 직결되는 식량권리마저 놓쳐버리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감출 수가 없다. 한 나라의 식량권리가 흔들리면 국민의 생존뿐만 아니라 전통문화도 안전할 수 없다. 경쟁력이 절대가치라는 세계흐름 속에서도 한국적인 농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깊이 간직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전통농업은 당당한 직업의 대상이어야 한다. 한때 농업인은 천대받는 직업인들에게나 붙여지는 농사꾼이라 불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지켜온 전통농업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이어가는데 가장 큰 공로자였음을 우리 모두 상기해야한다. 고유의 농법을 지키는 일은 곧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고 우리 문화를 지키는 일이다.

산업화와 개방화로 표방되는 현대 사회에서 전통농업이 살아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전통농업을 지키는 농촌과 농업인의 소득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전통이 담겨진 농촌 경관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큰 가치다. 여기서 생산된 농산물이 전통식품으로 발전하고 소비로 이어지는 식문화도 육성해야한다. 당연히 전통식품은 소비자의 기호 변화에 부응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대별로 즐겨 찾는 식품을 개발하고 다양한 기능성도 발굴해야한다.

기후와 환경 변화에 적응한 작부체계의 틀도 새로 짜야 한다. 또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차별성과 경제성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다. 이런 장해물을 하나하나 극복하여 우리만의 전통농업과 건강한 로컬푸드 그리고 아름다운 농촌 어메니티로 굳건하게 이어나가기를 고대해 본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문화를 지키고 이 땅의 먹을거리를 지키고자 하는 온 국민의 깊은 애정과 끊임없는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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