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하도 많이 오니 녹는데도 여러 날이 걸립니다. 큰길이야 제설차가 다니면서 밀어 놓아서 삼사일후부터는 차량통행에 어려움이 없었으나 지방도로 분류된 도로나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들은 눈을 치우지 않아 아직도 막혀 있는 곳이 많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차들이 미끄러지고 빠져서 허우적대기 다반사고 사람도 넘어져서 다친 경우가 많다는 군요.

저도 한삼일 눈 속에 묻혀 엎드려 있다가 천지사방이 눈으로 덮인 게 너무 답답하여 나흘째 되는 날은 삽을 들고 나섰습니다. 눈을 빨리 치워내야 땅이 고슬고슬 해지는데 너무 많이 와 버린 덕분에 처마 밑 그 안만 빼고는 모두가 눈인지라 치울 엄두도 나지 않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서대로 한다면 지붕에 쌓인 것을 먼저 긁어내려야 낙숫물이 안 떨어지고 그 긁어내린 눈과 함께 토방 바깥의 마당에 쌓인 것을 끌어내어야 마당도 빨리 마르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여 우선 찻길부터 치우기로 했습니다. 저의 집에서 행길까지는 꼭 이백 미터인지라 바퀴자국을 따라가며 눈을 치운다 해도 양쪽으로 사백 미터입니다. 무릎높이로 쌓여서 전혀 녹을 기미가 없는 눈을 한 삽 한 삽 떠내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니 이건 차가 지나갈 만한 길이 생기기보다는 터널 하나가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삽질하다 쉬고 하다 쉬기를 반복하니 겨우 한쪽이 뚫렸습니다. 무려 한 시간 반.

그동안에 몸이 더워져 윗옷을 벗어버리고 삽질에 열중했더니 나중에는 뱃살이 꼿꼿해져서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일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힘든 삽질을 해대니 힘살이 놀랜 듯합니다. 그렇게 한쪽만이라도 치워 놓으니 답답한 것은 조금 나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만, 이제 나머지 한쪽을 치워 낼 일이 걱정입니다. 더군다나 점심을 먹고 나니 양 어깻죽지마저 뻐근하고 몸이 나른하게 늘어져서 다시 삽을 잡을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래 내일 할까 하다가 한참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는 아들 녀석을 꼬였습니다.
“야 이 녀석아, 게임 고만하고 이따 나랑 한 시간만 눈 좀 치우자” 묵묵부답입니다. “게임도 너무 오래 하면 좋지 않다. 운동도 좀 하는 셈치고 응?” 그래도 묵묵부답입니다. 애비 말을 듣는지 마는지 손가락은 쉼 없이 자판위에서 춤추고 눈은 화면에서 떠날 줄을 모릅니다. 여기서 제가 열을 받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라는 위치의 강압으로 큰소리를 내서 그것을 그치게 하고 억지로 끌어내어 손에 삽을 쥐게 할 수는 있지만 제 경험으로 그렇게 하면 여러 가지 불편한일이 생깁니다. 저만한 나이의 부모 자식간이 실은 얼마나 위태위태한지 겪어본 분들은 다 아시겠지요.

그래 다시 인내심을 가지고 꼬여 나가되 이번에는 방법을 달리 하죠. “에구 에구 허리 아파 못살겠다. 저걸 마저 치워내야 하는데 걱정이구나!” 여전히 묵묵부답 “차를 끌고 나가야 하는데 저걸 어쩌지? 누가 좀 도와주면 한 시간도 안 걸릴 텐데…” 그제는 슬쩍 돌아봅니다. 성공입니다. 과연 아들 녀석을 대리고 교대로 삽질을 해 나갔더니 꼭 한시간만에 마저 한쪽을 치워낼 수 있었습니다. 몸을 쓰는 일을 했으니 여세를 몰아 다른 일을 조금 더 해도 될 겁니다. 한참 기운이 들기 시작하는 나이인지라 힘쓰는 일의 재미에 빠지면 그 또한 게임을 잊을 수 있는 것일 텐데 안타깝게도 이 겨울 눈 속에서 눈 치우는 것 말고는 할일이 없군요.

그래도 녀석은 기지개를 켜듯 활기찬 몸짓을 합니다. 다시 금방 컴퓨터 앞에 앉겠지만요. 옛날 생각납니다. 제가 클 때는 그러니까 꼭 아들 녀석의 나이 때인 사십년 전에는 컴퓨터 없는 세상이었고 시골 이어서였을까요? 낮에는 나무해다 한 단 한 단 쌓는 재미로 밤에는 친구들끼리 모여 노는 재미로 보냈습니다. 화투로 국수내기 뽕치기와 가끔씩 남의 닭서리 하기, 제사 집에 단자 부치기, 눈이 오면 그냥 괜히 좋아서 밤을 새고 새벽까지 동네 고샅을 희희덕거리며 싸돌아다니기. 그렇긴 해도 방학을 맞은 지금 애들처럼 오전 한나절까지 자빠져 자는 게 아니라 아침이면 아무리 잠이 부족하고 졸려도 어김없이 일어나서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갔습니다. 눈 비만 오지 않으면 말이지요. 그렇게 하루에 나무 두 짐을 해놔야 밥 값했다는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그런 다음에 놀아야 스스로 찜찜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때가 옛날에는 참 많아서 눈 쌓인 상태가 한 달 동안 이어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할일이 더 늘었답니다. 하루에 한 번씩 멀리 떨어진 우물까지 가서 물지게로 물 져다 부엌 항아리에 가득 채워 주는 것도 뺄 수 없는 일입니다. 눈이 많이 오고 미끄러지게 추우면 물 긷는 것이 남자들 몫이 되는 겁니다. 그런 다음 집안에 쌓인 눈들 긁어내다 앞 바다에 져다 버리는 것이 큰일입니다. 고샅에 버려서도 안 됩니다. 다함께 다니는 길이라 자기 집 앞 고샅의 눈까지 치워내야만 질컥거리지 않아서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좋아 하지요. 바로 그런 것이 향약정신이지 않았나 싶어요. 어른이건 우리 같은 아이들이건 맡은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자기 일 미루지 않고 했던 옛날이 자꾸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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