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다고 해서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이제 겨우 마지막 꽃샘추위임 직한 추위가 물러가서 사나흘 일하는가 싶었는데 다시 손발 묶어 둬야 되겠습니다. 사람은 땅이 얼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밭을 매기가 어려운데 풀은 추위와 낮 밤을 가리지 않는지 하루가 다르게 크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양파 밭 네 두둑 정도 남았으니까요.

 사흘정도 하면 끝이 날 겁니다. 하지만 그게 참 제 맘대로 되지 않더군요. 날씨도 푸근하다고 해서 오늘은 하루 종일 아내와 함께 그야말로 옹골지게 매 보려던 참이었어요. 그러던 찰나에 들려오는 불길한 느낌의 전화벨 소리! 수화기를 들자 후배 한사람이 말해 오기를 이웃 시에 가서 무얼 좀 사와야 되는데 자기는 잘 모르니 꼭 같이 가서 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혼자만 가는 게 아니고 저도 잘 아는 사람 하나도 같이 가니 일보고 점심 겸 술이나 한잔 하자는, 일종의 꼬드김을 곁들였습니다.

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죠, 굳이 내가 가지 않아도 잘 사올 수 있을 것이며 지금은 바빠서 못가겠다. 미안하다고요. 하지만 형님이 가지 않으면 도저히(?) 되지 않을 일이라며 막무가내로 사정을 하니 또 슬그머니 마음이 약해집니다그려. 제가 보기엔 일 핑계대고 서넛이 뭉쳐가서 속닥하니 밥도 먹고 술도 먹자는 거라 생각되는데 제가 끝끝내 탈탈 털어버리고 거절하면 사나이들끼리의 의리상 뒷맛이 조금 거시기 하겠지요.

그래 안식구에게는 약간 뻥을 쳐서 “아무리 해도 금방 나를 데리러 온다는데 오거든 그냥 돌려보내고 밭에 나감세. 먼저 가서 매고 있어” 그러고는 이내 온 차를 타고 바람같이 집을 벗어났답니다. 이웃 시까지는 약 40분, 한 시간 반가량 일보고 돌아오는 길에 짬뽕 맛있게 한다는 집에 들렀습니다. 저는 아니지만 같이 간 후배 둘 다 어젯밤 술깨나 펐다고 얼큰한 짬뽕에 배갈로 속 풀자는 심산이지요. 막 시켜 놓은 음식이 나와서 저분을 들려는데 안식구에게서 전화가 오는군요.

“자기 지금 어디야?” “응 나 지금 사람들이랑 일보고 들어가는 중이여”
“아니 안 간다고 하더니 왜가? 내가 미쳐” “그렇게 됐어, 금방 갈게 먼저 점심 먹어”
“ 금방 온다며 오면 같이 먹지”  “아녀, 어쩔지 모르니까 그냥 먼저 먹어”

도저히 지금 짬뽕 시켜 놓고 앉아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 안고 한량하게 나와서 외식을 하는데 안식구는 쎄빠지게 일하고 집에서 매일 먹는 반찬에 밥을 혼자 먹는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이 나오나. 어쨌거나 오후 두시쯤이나 돼서 집에 오니 점심 먹고 잠깐 드러누워 쉬지도 않았는지 양파 밭고랑에 아내가 앉아 있네요. 멀리서 봐도 화가 나 있는 게 보입니다.

저도 서둘러 옷 갈아입고 호미 쥐고 밭에 가서 아내 옆에 가 앉았습니다. “화났어?” 핸드폰을 켜 놓고 노래를 듣던 아내가 “무념무상!” 딱 한 마디뿐입니다. “오호 무념무상이라 - 근데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노래 듣고 있었을 뿐이야” 이러는 이 여자도 내공이 이제 10갑자쯤은 되는군요. 그닥 화는 나지 않은 듯해서 우리 내외는 오후 한나절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행복하게 일했습니다.

오늘도 밭을 매야 하는데 생각해 보니 비가 오면 묵은 밭에 풀이 정신없을 것 같아 먼저 밭을 갈아야 할 것 같군요. 그리고 거기 한 편에 감자 종자도 묻어야겠고요. 감자 종자 잘라 놓은 지가 열흘이 다 됐는데 추운 날씨 탓하며 차일피일 미뤘더니 빨리 묻어 달라고 조르는 듯 싹이 손톱만큼씩 자랐습니다. 안식구에게는 다시 한나절만 혼자 매라고 하고 경운기 시동을 걸기 전에 감자 뭍을 곳에 거름부터 냈습니다. 아니 그전에 큰 풀부터 대강 뽑아냈습니다. 갈면 속으로 들어가기야 하지만 감자 두둑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차피 다 추려내야 할 것들이고 봄풀은 성장력이 강해서 땅에 묻혀도 여간 죽지를 않아요.

그런데 잠깐 할 것 같던 풀매는 것도 한 시간을 넘겼고 거름내서 펴는 것도 한 시간을 넘겼고 경운기로 갈아서 고랑을 내는 것도 한 시간, 그래저래 아침 한나절을 훌쩍 다 보내 버렸습니다. 오전에 끝낼 것 같았던 일이 그리 못하게 됐습니다. 해서 점심도 마루에서 후딱 먹어 치우고 커피한잔 한 다음 바로 감자를 묻었습니다. 한 박스 신청한 종자가 갈라보니 약500여 쪽이 나와서 길게 세고랑에 나눠 묻고 둥실하게 두둑을 만드는 것입니다. 비닐은 씌우지 않았습니다.

비닐을 씌우면 수확이 많을 것은 정한 일이나 그러면 감자의 탱글 하면서도 살이 툭툭 터지는 맛도 없고 보관도 쉽지 않지요. 비닐을 씌우지 않으면 자칫 봄 가뭄을 타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감자는 맛이 좋답니다. 캐보면 감자에서 쇳소리가 날 지경입니다. 감자 묻고 두둑 만드는 일도 꼬박 오후 세시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끝을 내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합니다. 감자는 처음 심을 때 전체일의 90%이상을 해 버리는 것이라 심어만 놓으면 먹은 거나 다름없는 농사입니다. 이제 비가와도 그다지 걱정 없이 하루 쉴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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