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위해 아침 일찍 밖에 나와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서리가 마치 눈처럼 오지 않았습니까, 온천지가 바늘 끝 같은 서리로 번쩍이는 은세계를 만들고 있는 그 장관은 아직 햇살이 올라오기 한참 전의 어둑한 여명 속에서도 잠깐 순정하고 찬란한 또 다른 세상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날은 틀림없이 청명 그 자체일겁니다. 햇살이 퍼지기 직전부터 새가 여기저기서 울고 꽃망울이 벙글고 연못에선 올챙이 떼들이 고물고물 헤엄치고 멀리서 닭이 울고 굴뚝에선 흰 연기! 그렇습니다. 이렇게 아침 기온이 떨어진 서리 온 날의 굴뚝연기는 주변과의 온도차 때문에 유달리 희고 푸르고 풍성합니다. 그 연기 속에는 시래기 된장국이거나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섞여있습니다.

오늘 아침은 조금, 아니 아주 넉넉하게 느긋합니다. 어제까지 그동안 씨름하던 양파 밭 풀매기가 끝난 탓도 있고 또 오늘은 토요일, 어제 학교 수업 마치고 일찌감치 집에 돌아온 아들 녀석은 제 방에서 아침 먹을 생각도 없이 세상모르게 단잠에 빠져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내 새끼라고 하는 말속에 담긴 그 뜻이 참 뭐라 말할 수 없이 든든하고 푸근하지요? 그래 딴 날보다도 30분 정도 아침도 늦게 먹고 설거지하고 아내가 솥에 덥혀진 물로 빨래 몇 가지 주무르는 동안 저는 혼자만 커피 한잔을 타들고 방문 열린 마루 끝에 앉아 있습니다.

산등성이를 넘어온 햇살이 빠르게 누리에 퍼지면서 햇살과 산그늘, 서리 녹은 곳과 녹지 않은 곳의 경계에 찬란한 무지개를 만들어 흩뿌리는군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식목일’ 하고 입 밖으로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바로 집 옆의 산에 진달래가 연분홍 자태를 드러낸 게 눈에 띄어서인가 봅니다. 청명 바로 다음날인 4월5일은 한식이자 식목일이죠. 아직 며칠 더 남았습니다만 오늘 같은 날은 그날이 아니어도 청명이고 식목일이라는 이 느낌!

커피 잔 들고 벌떡 일어나 진달래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옛날과 달라 이제는 길옆 햇빛 받는 쪽에나 몇 그루 듬성이지만 나무해먹던 민둥산 시절엔 온 산이 그야말로 붉게 타 올랐어요. 제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진달래 옆에는 작년부터 봐둔 엄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어 이제 옮겨심기 알맞은 크기로 자랐군요.

 맨 위의 새순이 부풀어 오는 모습과 밑동의 굵기를 흔들어 보면서 저는 어느새 아련한 옛날로 돌아가 괭이 한 자루를 어깨에 메고 왔습니다. 물론 제 동무들과 함께요. 여기저기 서로 흩어져서 캐기 알맞은 진달래를 찾아 캐기 시작합니다. 가능하면 꽃이 아직 피지 않은 걸로 캐야 해요. 꽃이 활짝 핀 것은 제 아무리 뿌리가 상하지 않게 캔대도 꽃이 시들고 나중엔 죽기 쉽지요.

캐는 건 진달래 뿐 많이 아닙니다. 노간주나무 어린 묘목도 상록수라서 괜찮고 사철나무, 그리고 좀 더 높은 바위에 오르면 회양목이 좋지요. 이 나무는 도장 파기가 좋아서 도장 나무라고도 하는데 저희들은 벌써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이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서 주머니  칼로 자기 도장들을 파 가지고 다녔어요. 캐려고 마음먹은 나무들을 다 캐면 그 다음에는 인제 칡뿌리를 찾아 캐냅니다. 나무뿌리처럼 딱딱한 것은 버리고 그냥 손으로 잡고 분질러도 뚝뚝 부러지는 알칙을 캐면 풀뿌리 같은 곳에 문질러 흙을 대강 씻어 버리고 주머니 칼 꺼내서 한 토막씩 잘라서 나눠먹곤 했지요.

그리고는 입술과 이빨이 칡 물로 검붉어진 동무들을 보곤 서로 놀려댔습니다. 진달래나 회양목 같은 것은 제가끔 집안의 화단에도 심고 비교적 큰 나무들은 마을 입구의 동구에 만들어 놓은 화단에 심었습니다. 봄이 되면 으레 것 한두 차례씩은 약속하지 않아도 서로 어울려서 산으로 몰려가고 나무를 캐다가 화단을 장식하고 마을을 가꾸는 게 우리 어린애들의 몫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런 것은 우리 머릿속에 심어진 것인데 돌아보면 참 행복하고 순정들 했다 여겨집니다.

저의 상념은 여기까지. 올해도 나무 몇 그루를 더 심었습니다. 집 주변에 심어진 나무들을 보기 좋게 잘라 주다가 몇 군데 새로 심거나 다시 심어야 할 곳이 눈에 띄어서 후배 한명을 끌고 이웃면의 야산에 가서 나무를 캐왔습니다. 낸들 가보지 않은 그곳에 그 나무가 많은 줄 어찌 알겠습니까만 후배가 작년에 우연히 그곳에 가서 보니 많아도 아주 많더라 해서 제가 귀찮게 꼬드긴 겁니다. 그렇게 심어 놓고 나서는 내 어릴 적부터 내 머리에 심어진 기억대로 손 탈탈 털고 흐뭇하게 바라보며 잠깐 행복에 젖었는데요, 오늘처럼 좋은날엔 또 어쩔 수 없이 무엇에 씌인 듯 나무를 심고 싶습니다.

늦기는 이제 좀 늦었어요. 이미 진달래 개나리가 피고 살구 자두는 금세라도 터질듯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물이 오르고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온몸으로 느껴지는데 미리 캐서 가식을 해 놓지 않은 이상 산에서 바로 캐서 옮기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은 거지요. 그러나 참 희한하게도 꼭 옛날의 저처럼만 같이, 죽든 살든 이 엄나무 한그루를 캐서 아주 좋은 곳에 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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