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부의 혁혁함을 중원에 떨치다

  
 
  
 
군관(軍官)님이 여자라고?

“이봐 자네들 여자 밑으로 배치됐다며?”
“그러게 말이야. 창피해 죽겠네...”
“하하하. 군복이라도 찢어지면 바느질은 잘 해 줄 테니 그건 좋겠네.”
“그러게 말일세. 반찬도 잘 나올 테지...킬킬킬.”
“그만들 하게. 만나는 사람들마다 놀려대니 어디 견딜 수가 있나.”

때는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으로 몸살을 겪던 1597년 중국 명나라의 충주(忠州) 지방에서의 일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은 고급장교 벼슬인 선무사(宣撫使) ‘마천승’ 부대 소속의 장병들로, 4000명 가까운 장병들 중 500여 명이 마천승의 아내인 진양옥 휘하로 배치된 것이다.
마천승의 아내인 진양옥은 아직 서른도 안 된 젊은 여성으로 창술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사병들은 여(女)군관 밑에서 영을 받들어야하는 자신들을 창피해 하고 있었다.

“자네들 이야기 아까부터 죽 듣고 있었네....그런데 자네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네.”
진양옥과 같은 마을 출신이라는 한 사병이 끼어들었다. 그 병사의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진양옥은 여자지만 무술의 달인이라네. 창술이나 검술로 어지간한 사내가 그녀를 이기기 위해서는 응당 목숨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네....”
사병이 설명하는 진양옥은 이랬다.

여장부로 자란 딸

그녀는 1573년 삼남 일녀의 외동딸로 태어났는데 특히 부친의 사랑이 극진했다.
아버지는 항상 진양옥을 데리고 다니며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주었다.

그러나 어린 양옥은 물건에 대한 호기심 보다는 세상의 이치와 삼라만상의 의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 남자에 비해 여자들은 왜 차별대우를 받아야 하지요? 공맹의 가르침은 남녀가 유별하다고 한 결 같이 가르치지만, 다만 신체의 구조와 타고난 용력이 다를 뿐, 각자의 역할은 존중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린 양옥의 논리와 정신세계는 아들들을 능가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의 재능이 아까워 남자와 똑같은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양옥의 키가 시원시원하게 뻗어있고, 골격도 튼튼한 데다 민첩하고 유연하기까지 해서 아버지는 딸에게 무술까지 가르쳤다.
“계집애에게 무술을 가르치다니 당신 정말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아내의 타박도 소용이 없었다. 진양옥은 특히 말을 타고 가며 활을 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격렬하게 뛰는 말 위에서 쏜 화살이 멀리 떨어진 과녁에 정확히 박히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는 ‘저 아이가 사내였다면…무서운 장수가 되었겠구나…’라고 생각하곤 했다.

양옥은 창술(槍術)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사범으로부터 창술을 배우면 그 기술이 완전히 자기 몸에 밸 때까지 창을 놓지 않아 20대 초반엔 일대에서 창술의 일인자 소리를 듣는 경지에 이르렀다.

“원리 선무사(양옥의 남편 마천승) 님 집안이 어떤 가문인가? 그들은 삼국지의 유명한 장수 마초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집 안이네. 진양옥을 아내로 맞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선무관 님은 진양옥의 신기에 가까운 창술 실력에 반해 아내로 맞았다는 것일세.”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사병의 주위에는 이미 수 백 명이 모여들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최강의 창병(槍兵)

진양옥의 사병들은 군관의 시범을 보면서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히야~ 저 절묘한 손목놀림과 목, 허리, 발에서 한 몸처럼 움직이는 창의 흐름 좀 보라지.”
“우리는 가지고 다니기에도 불편한 15척 장창(長槍)도 여인네들 비녀 다루 듯 하니 그야말로 신기랄 수 밖에...”

1599년에는 양쯔강과 충칭 인근에 창궐한 도둑 소탕작전에서 남편 부대를 도와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진양옥이라는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 도적떼가 대패한 것은 진양옥의 ‘백저병(白杵兵)’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까닭인데 백저병은 수년간의 훈련으로 다져진 창술의 정예병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진양옥부대는 남편이 시기할 정도로 크고 작은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명나라는 만주벌판에서 발흥한 북방의 영웅 누르하치의 ‘청나라(처음에는 후금(後金)이라 칭했음)’에 야금야금 잠식당하며 쇠망 해가고 있었다.

나라가 약하니 영이 서질 않았다. 드넓은 중원에는 도처에 도둑이 들끓었고 ‘새 세상의 주인입네’하고 나서는 얼치기 영웅들이 나타났다.
한마디로 말세요 난세였던 것이다.

동산호의 목을 베다

남편 마천승은 사소한 모함으로 관직을 잃었으나 곧 누명이 풀렸다.
짧은 옥사 동안 몸이 많이 쇄했고 억울함으로 인한 화병으로 곧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시기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조정으로부터 남편의 부대를 그대로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된다.
이는 멀리 떨어진 조정에서도 진양옥의 창병에 대한 명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남편의 부대를 물려받은 진양옥은 전보다 더욱 강병으로 키워나갔다.

특히 진양옥이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창술과 창병 운용의 작전에서는 무적의 부대로 거듭나고 있었는데, 이를 모르고 달려들던 무모한 자가 있었으니...

“묘족(苗族)출신에 여자라… 후후훗 웃기는 부대로구나.”
양쯔강 중류지역을 공포에 몰아넣던 도둑떼의 수괴 ‘동산호’라는 자는 진양옥을 비웃었다.
“그냥 단번에 쓸어버리자. 창 좀 쓸 줄 안다고 하던데…뭐 대단하겠어?”(동산호)
“그렇습니다. 우리 무리는 한 번도 관군에게 패한 적이 없는 무적의 용사들입니다.

난다 긴다하는 지방관들이 다 우리에게 손을 들었고, 중앙에서 파견된 정예병들도 우리에게 손들고 도망가기 바빴지 않았습니까? 두령님 명만 내려주시면 하루 안에 그 늙은 년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뭐 죽일 필요 있겠느냐? 잡아 오너라. 잡아 와서 얼굴이라도 반반하면 내 너희들 첩으로라도 넘겨주마. 하하하…”

이 따위 시 덥지 않은 말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던 도둑들의 목이 창끝에 꾀어 저자거리에 효수(梟首) 된 것은 그로부터 삼일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동산호 무리가 진양옥부대를 공격하기 하루 전, 진양옥은 이 첩보를 입수하고 밤 새 도둑패의 진영을 기습했던 것이다.

도둑들은 구심점이 약하기 마련 동산호의 부하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기 바빴고 핵심인물들 600여명은 그 날로 모두 죽음을 당했다.

명장(名將)의 반열에

동산호 무리 토벌은 진양옥의 이름을 황제에게까지 알리게 하는 계기가 된다.
황제(의정 숭정제)는 진양옥을 불러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장하도다. 여장부여. 내게 그대와 같은 장수 열 명만 있었어도 오늘과 같은 어려움은 겪지 않을 것을...”
황제는 그녀에게 술을 권해 마시게 하고, 비단과 보물을 내리고 네 편의 시를 지어 그녀를 기리게 했다.

이후 진양옥은 70의 노구가 될 때까지 장수로서 활약했다.
명나라(건국 1368∼멸망 1644)의 쟁쟁한 인물들만 소개돼 있는 명사열전(明史列傳)에는 그녀의 활약이 이렇게 소개돼 있다.

<사천성이 위험에 빠졌을 때 진양옥이 앞장서 도둑의 무리를 토벌했다. ‘성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창병부대를 이끌고 역적들을 토벌했다. 동산호 무리 600여 명을 죽이고 수괴 동산호의 목을 베었으며 반란군 무리가 진양옥을 회유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자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베어 추상같은 영을 실천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결국 청나라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만다.
진양옥은 말년에 황제가 있는 명나라의 수도 북경 방어를 위해 부대를 이끌고 상경하지만 이미 기울어가는 나라 명(明)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

한 때 북경을 포위한 청나라의 강병을 막아내기도 했고 몸소 성 밖으로 부대를 이끌고 나가 적을 격퇴하기도 했지만 황제는 너무 늙어 병약해 진 그녀의 낙향을 윤허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명나라가 멸망(1644년)한 4년 후인 1648년 고향에서 눈을 감았다.
명사열전에는 128명만이 실려 있을 뿐이고, 중국 정사에서 여장수로 기록된 이는 진양옥이 유일하다.

진양옥은 무협과 영웅담에 열광하는 중국 인민들에게 최고 캐릭터의 여걸로 기억되고 있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